경자년은 하얀 쥐의 해입니다. 예로부터 하얀색은 이롭고 총명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얀 쥐는 ‘지혜와 총명’을 갖추고 있는 영물 중 하나입니다. 하얀 쥐의 경자년 한해는 우리 모두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자비의 지혜가 이 땅에 가득하기를 축원드리며, 새해 인사와 함께 칼럼 ‘손오공이 돌아왔다’ 제1화를 시작합니다.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허영만 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만화로 우리에게 꽤 익숙해져 있는데, 성불여행으로 부처가 된 그 손오공이 혼탁한 지금의 우리들 삶을 보면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앞의 3인은 죽은 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대원군으로 추증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은 1863년 12월 고종이 12살로 왕위에 오르고 바로 대원군에 봉해졌으니 힘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일들이 많았다. 학자에 따라 그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만큼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당색과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한 점,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한 균일 세법 도입 등은 선진적인 정책이었다. 당시 최고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파를 제거하여 세도정치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우왕 1년(1375)에 김해부에 침입하여 살육과 분탕을 일삼고 관아와 성문을 파괴했으며 11월에는 경상도 순문사 조민수가 밀성으로 침입하려는 왜선 수십척을 김해 황산강에서 왜구 29급을 참살하였고 적중에서는 강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많았다. 우왕 6년 10월에도 왜구가 김해부에 침입하였는데 당시 김해부민의 삶은 왜구로 인해서 참혹하였음을 분성기문에서 더욱 느낄 수 있다. 세월에 허물어진 분산성을 우리가 다시 복원한 것은 나라사랑은 김해부민을 지키는 것임을 선현의 위대한 나라사랑을 찾고 지킴일 것이다. 포은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이에 명을 내려 옛 산성을 수축하여 넓고 튼튼하게 하였다. 돌을 포개어 굳게 하고 산세를 이용하여 높게 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우뚝 솟은 성벽이 천길이라 한 사내가 문을 막아서면 많은 장정일지라도 성문을 열수 없을 테세였다. 김해부 사람인 통헌대부 배원룡 공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청하기를 “산성을 수축한 것은 만세의 이로움이오. 우리 부사를 아는 사람으로 공과 같은 사람이 없으니 감히 기문을 청합니다.” 하였다.내 생각으로 위험한 곳에 변고를 대비하여 설비를 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도일
가락국의 주산 분산 1) 분산의 분산성 분산에 분산성과 만장대가 있다. 분산은 김해의 주산이자 진산으로, 시청 동북쪽을 호위하고 있다. 정상의 남쪽 봉우리는 해발 328m로 끝자락에 만장대가 있으며, 천문대가 자리잡은 북쪽 구산봉은 377m다. 분산은 분성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분산의 근원이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쌓을 때 동이 즉 분모양으로 쌓아 그 이름이 생겼다. 주산에도 가락국 때 처음으로 산성을 쌓아 분산성이 되었고 오랜 세월에 분산, 분성산으로 표기되고 있다. 『김해읍지』의 형승조는 분산산성을 이렇게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궁리와 행의를 똑같은 비중으로 중시할 수 없으므로 이 중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견해상이 차이가 생겨나게 된다. 먼저 궁리를 행의보다 더 중시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는 궁리가 제대로 되어야만 올바른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므로 행의 이전의 궁리에 치중하게 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행의를 경시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거경궁리(의식의 각성을 바탕으로 의리를 탐구함)’로 요약된다. 조선조 성리학자 중 퇴계 계열의 주리론자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들은 우주의 본체와 인간 심성에 관한
『읍지』는 황산강을 “부의 동쪽 40리, 양산군과의 사이에 있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의 낙동강으로, 그 위치는 상동면과 양산의 원동면 용당리 사이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황산원의 위치를 “부의 황산강안”이라 밝혔으므로, 작가가 김해부에 왔다가 황산원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주위 풍광에 취했음을 느낄 수 있다. 황산원은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의 이름이었던 황산도의 중심역 황산역에 달린 원이었다. 황산역은 양산에 있었고 황산원은 대동면 초정에 있었다. 역은 교통수단인 말을 관리하는 곳이고 원은 오늘날 여관이었는데 황산원은 고
물결소리에 놀라 깨니 바람 기운이요활짝 개인 산색은 비가 애쓴 보람이다.그 중에 아름다운 경치 누가 거둘까?시인 묵객들이 모두 가져가리라. 만경침침요화루어등만점족성도장병잡지창산합척벽당천소월고 노공송초경학객인미하엽실귀부가린거세분명리휴수탐기고소도 늦은 경치 침침하게 그림 되어 누각을 두르고무수한 고기잡이 등불 밤하늘 별자리 같다.긴 병풍 땅을 두른 듯 푸른 산 합치고많은 구슬 하늘에 뜨자 하얀 달이 외롭다. 이슬 내린 소나무끝 학이 객을 놀라게 하고안개에 싸인 연잎에 반해 비석을 찾지 못한다.가련하구나, 세상 명예와 이익에 바쁜 사람들
뇌진 - 류중영금관천년지가의일우동묵대청강수함정향아동 금관(김해) 오랜 옛 땅에갸륵한 아이 또 하나 있구나.말없이 맑은 강 마주하며정을 안고 나는 동으로 간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여덟 번째 작가는 류중영이다. 그가 사성으로 있을 때 김해부로 출장 오는 길에 해양강(낙동강) 뇌진에서 탄 배를 저었던 배운상이라는 소년에게 부채에 써서 건넨 시이다. 시가 세상에 전해진 것이 흥미로운데, 류중영의 아들 류성룡이 어느 해 선조 임금의 배려로 남쪽 지방을 둘러보던 중 김해에서 아전 배운상을 만났는데, 서첩 하나를 보이면서 “을묘년에 제가 조그만
월파정죽여일일요동호불가매화일일부설월휘연편무미강산승처전기고 반조미인경우물파필하증부자도칠점삼차춘역호문군지기유임포 대나무 가마로 날마다 동쪽 호수 둘러도매화는 하루도 없으면 안 되겠네.눈에 비친 달빛은 마음을 끄는 요염함이라강산의 경승 찾아다니는 일 외롭네. 우물은 차마 가벼이 못해 붙잡지만붓 들고 어찌 자도를 읊었으리오.칠점산 삼차강의 봄, 역시 좋구나묻노라 그대에게 임포 같은 벗 혹시 있는가? 사렴진내상증시섬천재야야피형언상두촉루퇴 어원산풍산단능활부재청신다후점지척기성퇴 사렴은 참다운 한림학사일찍이 하늘에 빛난 재주 있네.밤이면 밤마다
조선조 도학자의 귀감이 되었던 점필재는 언제 김해에 다녀갔을까? 가락가야는 532년 신라에 병합되고 나라는 식읍 금관군이 된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까지 동일한 후인 문무왕 20년에 금관소경, 경덕왕 16년(757년) 김해소경이 되었다. 고려때 김해부가 되고 임해현, 금주, 금릉, 김해목에서 조선 태종 3년인 1413년 김해도호부가 되었으니 점필재는 김해부일 때 도요진에 온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고향인 밀양에 왔다가 김해부를 찾아 두 고장사이 황산강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면서 욕심 내지 않고 정답게 살아가는 도요 사람을 정겹게 그려
납릉-허 척성조당년벽차구용비봉무수병도운잉우모수유지누사증휘억고도 보탑태황춘우윤선대학거월륜고분성물색다의구유여소인감흥구 성조께서 이 지역을 개벽하실 때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자수병풍이었네.후손들이 사모하여 옛터를 중수하니누각은 더욱 빛나 옛 도읍을 생각한다. 보탑의 거친 이끼 봄비에 촉촉이 젖고학 떠난 초선대 달무리에 외롭구나분성의 물색은 다분히 옛과 같아시인묵객 더불어 머물며 감흥을 함께 하리라. 작가의 생몰년과 자세한 이력은 없고 『읍지』의 음사조에 “수로왕 음덕으로 장사랑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납릉-허 육지이수출천명구공해환산
납릉-노우수누관숙조불견인일춘제조몽전진낙일서성방초로주성시태독상신 다락집 쓸쓸히 사람 보이지 않고이 봄을 울어대는 저 새는 전 왕조를 생각하는가.해 지는 성의 서쪽 꽃다운 풀밭,술 개면 시흥이 끝나니 홀로 마음만 아프다. 작가 노우수는 1778~1848의 인물로 김해 출신이다. 호는 묵와이며 일찍이 유심춘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힘써 배웠다. “천진하였으며 학문이 깊고 의젓하였다.”고 『읍지』학행조에 적고 있다. 왕릉-김현로활해무원겁후진단청주각병연신삼한지입라왕국천재시봉임자춘조육천장시보경기다오소부지인 넓은 바다 무성한 언덕은 병겁으로 티끌이
수릉군과 제전이 있으며 세종임금이 병인년에 두 릉 둘레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우고 북돋아 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 무슬년에 능이 저절로 무너짐에 계청하여 고쳐봉토하고 갑오년에 부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고 봉식하라 하였고, 정종 경자년에 치제하고 비석을 고쳐 세웠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네 번째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릉에 대한 많은 기록들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근원일 것이다. 아름답고 신비롭게 전해온 사서에 후인으로서 감사하며 옛 선비들의 수로왕릉에 대한 시를 찾아본다. 가야의 종주국인 가락국의 고토 김해
김해읍지에 작가가 지은 금릉팔경 2편이 실려 있으며 두 번째 금릉팔경의 구지석람도 소개해 본다.구지석람-김건수산비낙예자생귀불수문장야최기남기일변강담수해상가변차난이낙수의 근원도 아닌 산에 거북이 생겼네어떠한 문장도 받지 못했으나 참으로 기이하다.아지랑이 한쪽에서 맑은 물방울 만들고바다가 육지로 변할 수 있어도 이것은 옮기지 못하리라. 이 시는 작가가 김해부사로 재임시 지었다고 본다. 일 년 여의 부사재임 동안 수로왕의 탄강지 구지봉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문화와 경승을 노래하여 전하고 있음은 후인들의 복일 것이다.구지봉-허 의일편평봉천세귀
구지봉과 구지가 ‘구지가’ 혹은 ‘귀지가’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춤을 추고 있지만, 구야의 백성들이 동쪽에서 신라, 북쪽에서 고구려, 서쪽에서 백제가 창국한 것을 보고 출륭한 지도자를 찾아 통치자로 추대한, 민족사에 빛날 참 아름다운 ‘민주 가요’일 것이다.“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어라.내지를 않으면구워서 먹으리.”널리 알려진 구지가의 해석이다.“나랏님 나랏님대왕이 되소서.만약에 않겠다면구워서 먹으리.” 구지봉은 백성들이 나랏님을 맞이한 곳이요 지도자로 추대 한 곳이다. 그래서 구지봉은 귀지봉이 아닌 구지봉으로 오래 불러왔고
시조 수로왕은 구지봉에서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했고, 왕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철의 왕국을 건설했다. 오직 백성에 의한 백성의 나라였기에,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가락국의 운이 다하였음을 알고 신라에 항복하여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는 가락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해 4국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가락국의 조건 없는 항복과 가락왕족 신라 귀화는 신라가 통일 대업을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망국의 운명에서는 경순왕도 가락국
『사기』는 어느 부분에도 어떤 사서나 기록을 참고 또는 인용했다는 기술이 없다. 그러나 일연선사는 『유사』를 편찬하면서 우리 민족의 시원사를 실었으며 특히 「가락국기」는 그 머리에 "고려 문종 대강 연강에 금관지주사인 문인이 편찬 한 것을 간추려 싣는다." 고 밝혀 두었다. 큰 스님 이전에 학자요 문인의 양심을 다했다. 아쉽다면 필자의 못난 주장일지나 '가야'를 '가야'로 고쳐 적었다는 점이다. '더할 가'를 '절 가' 로 고쳐 적은 것은 불교나라 고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5. 소지마립간 권 제3① 3년(서기 481)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는 것을 추격하여 니하 서쪽에서 격퇴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② 18년(서기 496) 봄 2월에 가야국이 흰 꿩을 보내 왔는데 꼬리 길이가 5척이나 되었다. 6. 법흥왕 권 제4① 9년(서기 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의 이누를 보냈다.② 11년(서기
고려라는 통일된 왕권 단일국가가 탄생하기까지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등 각 나라 각 지역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를 모아 참고하고 또 살피며 보완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는 산지의 기록이요 승자의 기록이라 승자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야’를 기록한 『삼국사기』『유사』는 최고의 역사서인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건국 연대를 무엇 때문에 소급하여 기술했을 것인가. 오히려 가야의 우월함을 낮추고 줄이고 빼면서 만들었지 않았을까. 꼭 왜곡하여 기술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