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흘러 흘러 1천 3백리 도요진, 뇌진, 황산강

 

김종간 향토사학자.

  조선조 도학자의 귀감이 되었던 점필재는 언제 김해에 다녀갔을까?

 가락가야는 532년 신라에 병합되고 나라는 식읍 금관군이 된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까지 동일한 후인 문무왕 20년에 금관소경, 경덕왕 16년(757년) 김해소경이 되었다.

 고려때 김해부가 되고 임해현, 금주, 금릉, 김해목에서 조선 태종 3년인 1413년 김해도호부가 되었으니 점필재는 김해부일 때 도요진에 온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고향인 밀양에 왔다가 김해부를 찾아 두 고장사이 황산강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면서 욕심 내지 않고 정답게 살아가는 도요 사람을 정겹게 그려낸 시이다.

 시의 무대 도요는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도요마을 앞 낙동강변이다.

 읍지가 전하는 도요는 "강의 연안에 백성들이 살고 있으니 수백 호에 이른다. 집이 총총이 늘어서 울타리가 서로 이어지고 농업을 하지 않고 뱃일에 전념해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 여러 마을에 팔아 재산을 삼았다.

 마을 풍속은 순박하여 어느 집에 손님이 있으니면 각기 술과 안주를 가져와 예를 표하였다. 물론 혼인이나 상이 났을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느 집의 처녀가 음탕한 행실이 있으면 마을에서 회의하여 쫒아내었다. 가까운 마휴촌의 200호도 같은 풍속이었는데, 많을 때는 400호에 이르렀다. 또 힘써 배워 과거에 오른 자도 있어 사람들이 다투어 권하고, 학당을 지어 여럿이 모여 책을 읽어 과거에 응한 자도 꽤 많았다. 지금은 민촌으로 쓸쓸히 되어 겨우 촌락을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의 도요는 필자의 가슴에 슬프고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낙동강변의 개성 있는 문화 예술인촌으로 가꾸고 싶었지만, 시정에서 물러나 뜻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해거름 때 한 번씩 강변을 걷는다. 참으로 정 많은 분들이 살고 있는데 나는 왜 강 건너 동쪽과 상류의 북쪽만 바라보는가. 아름다운 도요의 삶 속에 그 누군가 더 아름다운 풍경을 새겨 넣어주기를 기다리며 점필재의 우정이 담긴 시 한편을 더 불러본다.

 

김극검 묘-김종직

 

문군이각복상비

해상산천극사비

천재승선응불사

풍연상반숙태기

 

평생부작소사비

빈발여하종종희

견설해양강상오

백매뇨귤저오시

안두영첩입추다

나차영남풍경하

동방고인진득의

일변시첨갱웅과

용진춘수곡문다

이노양령흥약하

미보주은구촉촉

자상타일당상과

 

듣건대 그대 이미 자하가 살찐 것 깨달아

바다 위 산천에 짚신이 나는 듯 하다더구려.

천 년 세월에도 죽지 않는 담시선인 같아

바람과 연기 짝하여 이끼 낀 낚시터에서 자고 있는가.

 

평생 백발의 슬픔 짓지 않았는데

머리털은 어찌하여 듬성듬성 빠지는가.

듣자하니 해양강 언덕 위에

흰 매화와 노귤심고 나의 시를 기다린다네.

 

책상머리 공문서 가을 오자 많아지니

이 좋은 영남 풍경 어찌 할까나.

같이 과거 보았던 옛 친구 참된 뜻 얻어

날마다 시를 우러러 나아간다는데.

 

용진 나무 봄물은 아름다운 무늬의 비단이고

두 늙은이 작은배 올라 흥을 누리고 싶네.

임금 은혜 보단 못해 함께 바쁘고 바쁘니

어느날 은거지에서 스쳐 지나갈까.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