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우왕 1년(1375)에 김해부에 침입하여 살육과 분탕을 일삼고 관아와 성문을 파괴했으며 11월에는 경상도 순문사 조민수가 밀성으로 침입하려는 왜선 수십척을 김해 황산강에서 왜구 29급을 참살하였고 적중에서는 강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많았다. 우왕 6년 10월에도 왜구가 김해부에 침입하였는데 당시 김해부민의 삶은 왜구로 인해서 참혹하였음을 분성기문에서 더욱 느낄 수 있다.

 세월에 허물어진 분산성을 우리가 다시 복원한 것은 나라사랑은 김해부민을 지키는 것임을 선현의 위대한 나라사랑을 찾고 지킴일 것이다. 포은이 분산성 축성 후 언제 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읍지』를 보면 제영조에 포은이 지은 시가 ‘연자루’ ‘초선대’ 등 두 편이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시기는 1377년 이전인지 이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산성 - 조석환

유만만개난촉각
조삼고수즉진함
기어무사승평수
불이평서영망남

만명이 열어도 어려운 촉나라 문처럼
세 곳(분성산은 동∙서∙북문 뿐이다)만 굳게 지키면 진나라의 함곡관이라.
말하나니 무사태평을 바라는 장수들이여
서쪽의 평안만 생각지 말고 남쪽의 왜를 잊지 말자.

 작가 조석환은 1805~1877년의 인물로 본관은 창녕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공손하였으며 말을 항상 조심하였다. 후진을 많이 길러 사표가 되었다.
이 시에서 작가는 분산성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 성이 산의 정상에서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쌓았고, 흑히 남문이 없고 동, 서, 북문만 있다는 것과 남쪽 왜를 경계할 것을 당부한 것을 미루어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171년에 정현석 부사가 다시 쌓은 후에 지은 사실을 알 수 있다.

 2) 분산의 만장대

 『읍지』 고적조.
 만장대는 분산성 남쪽에 있다. 부사 현정석이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무너지고 그 북쪽에 정국공 박 위, 흥선대원군, 관찰사 김세호, 부사 정현석이 창건하였는데 지금은 무너지고 그 북쪽에 정국공 박 위, 흥선대원군, 관찰사 김세호, 부사 정현석의 비석 네 개가 있고 그 남쪽 바위면에 대서로 ‘만장대’란 글이 새겨져 있고 ‘석파’ 두 글자는 흥선대원군의 호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두 번째

 만장대는 분산의 정상 즉 분산성 안 남쪽의 깎아지른 바위군을 말한다. 이 바위군의 가장 큰 바위에 한문으로 ‘만장대’란 글과 흥선대원군 도장이 새겨져 있다. 분산성이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것을 1871년 정현석이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다시 쌓고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은혜를 입었다고 새겼을 것이다.

 “만장대”란 글을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이 있으나 힘 있는 필력에서 시대의 힘 있는 자를 느껴본다.
대원군이란 조선시대 왕이 형제나 자손 등 후사가 없이 죽고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그 생부에 대한 호칭이었다. 조선시대 대원군은 모두 네 사람으로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다. 앞의 3인은 죽은 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대원군으로 추증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은 1863년 12월 고종이 12살로 왕위에 오르고 바로 대원군에 봉해 졌으니 힘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일들이 많았다. 학자에 따라 그 평가를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만큼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당색과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한 점,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한 균일세법 도입 등은 고감하고 선진적인 정책이었다. 당시 최고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파를 제거하여 세도정치를 분쇄하였고 당쟁의 뒷 조직이었던 서원을 전국에 49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서원은 처음 출발과는 달리 지방 양반 토호들의 근거지로 백성들에게 세금까지 거두기로 하였다. 서원철폐는 토착비리 근절과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였으나 지방 교욱제도의 약화라는 주정적 층면도 있었다.

 경복궁 중건은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힌다. 전국의 거목과 거석을 징발하고 부역을 강제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건설비를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물고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 건국의 태조가 1395년 지었던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867년 중건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음은 흥선대원군의 힘이기도 하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8천여 명을 학살한 천주교 박해, 쇄국양이 정책 등으로 열강을 자극하는 가운데서도 비변사를 폐지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조선조의 병조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했으나, 외적의 침입 등과 관련한 국방대책은 비변사가 맡았다. 즉 비변사의 폐지는 국가적인 무장해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현석 김해부사가 1870년부터 1873년까지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분산성을 다시 쌓았고, 이듬해 분산 정상에 흥선대원군 불망비를 세워 축성을 지원해 준 것에 감사의 뜻을 새겼으니 이 역시 김해의 소중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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