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구지봉에서 부른 민주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시조 수로왕은 구지봉에서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했고, 왕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아름답고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철의 왕국을 건설했다. 오직 백성에 의한 백성의 나라였기에,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가락국의 운이 다하였음을 알고 신라에 항복하여 피 흘리지 않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는 가락국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해 4국통일 대업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느껴야 한다. 가락국의 조건 없는 항복과 가락왕족 신라 귀화는 신라가 통일 대업을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망국의 운명에서는 경순왕도 가락국 구형왕을 모범으로 삼아 신라의 아름다운 역사 문화를 이어 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제2장 구지봉에서 부른 민주노래

구지봉과 구지가

김종간의 미친소리 세 번째

 

구지봉에 오르면, 정상에서 ‘구지봉석’이라 새겨진 지석묘를 만난다. 학자들은 지석묘가 기원 전 3세기 이전까지 수 백년간의 분묘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 지석묘가 구지봉의 주인일까.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전하기를 “아홉 부족장인 구간과 그 백성들이 이곳에 모여 계욕을 행하며 ‘구하구하 수기현아 약불현아 번작이끽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본다. 참 답답한 길손이라고, 호통도 없고 말이 없다.

구지봉과 구지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필자는 그들의 해석이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자의 발언은 그 힘이 ‘막강’하다. 비전공자의 논문이나 발언은 조그만 오류도 문제가 되지만, 학자의 경우는 ‘학문적 소신’ ‘양심 발언’ 으로 미화된다. 잘못되고 편협한 발언은 정치권이 더욱 심하기는 하지만, 학문분야 특히 가야사에서 지금도 뜨거운 감자로 널뛰기를 하고 있다.

구지봉과 구지가를 살펴보기에 앞서 「가락국기」가 전하는 가야 또는 가락국 이전의 구간사회를 살펴보자. 중국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은 가야를 변한 12국의 하나인 구야국 이었으며 통치자는 거수였다고 적고 있다. 우리 학자들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고 아프다. 그 시대에는 우리 말은 있어도 우리 글이 없었던 탓에 당했던 치욕이다. 어느 나라 지도자나 백성들이, 나라의 이름을 ‘개나라’라고 하겠는가? 중국측이 ‘거북나라’를 ‘개나라’로 적은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도 한글을 창제하면서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늦었지만 우리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께, 구지봉석 앞에서 감사의 예를 올린다.

구지가는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랜 노래이다. 특히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어느 고대국가도 시조를 맞이할 때 부른 노래가 없고, 오직 가락가야의 건국주를 맞이하면서 백성들이 부른 노래이다. 구지가가 ‘영신군가’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치자가 토착민 들을 힘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추대해 통치자를 만들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야의 백성들이 구지가를 부르던 당시에는 우리 글이 없었으므로 ‘거북이 노래’가 아닌 ‘나랏님 노래’가 되어야 하고, ‘구하구하’는 ‘거북아 거북아’가 아니라 ‘나랏님 나랏님’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한자 ‘龜’를 ‘구’로 읽을 때는 ‘나라 이름’이고 ‘귀’로 읽을 때는 ‘거북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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