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흘러 흘러 1천 3백리 도요진, 뇌진, 황산강

김종간 향토사학자.

 『읍지』는 황산강을 “부의 동쪽 40리, 양산군과의 사이에 있다.”고 적고 있다. 오늘날의 낙동강으로, 그 위치는 상동면과 양산의 원동면 용당리 사이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황산원의 위치를 “부의 황산강안”이라 밝혔으므로, 작가가 김해부에 왔다가 황산원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주위 풍광에 취했음을 느낄 수 있다.

 황산원은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의 이름이었던 황산도의 중심역 황산역에 달린 원이었다. 황산역은 양산에 있었고 황산원은 대동면 초정에 있었다. 역은 교통수단인 말을 관리하는 곳이고 원은 오늘날 여관이었는데 황산원은 고려시대부터 김해부에서 대동면을 거쳐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가는 휴식처, 즉 투숙지였다.

 한반도의 젖줄 낙동강은 옛 노래에 황산강, 태야강, 삼차강 등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옛 선비들이 가슴으로 지어 부른 노래를 감상할 때 오늘날의 낙동강을 연상하면 맛이 없다.

 낙동강 하구언에서 명지, 대저를 거쳐 대동면 월촌리에 이르는 대장제는 농업과 수해방지를 위해 1931~1933년 시행한 일천식 공사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김해평야는 물론 진영, 한림, 생림, 상동, 대동으로 이어진 낙동강변이 대부분 노전지대와 모래톱이었고, 물이 빠지면 강, 물이 들면 바다였다.

 장마철이면 대부분 지대가 불바다였지만 봄가을, 겨울의 김해는 높고 낮은 산으로 발원하여 흐르는 개울과 시내가 낙동강과 만나서 남해로 흐르는 그야말로 장엄함과 풍요로움을 지닌 풍광으로 가야 고도를 더욱 빛내는 생명의 강이었다.

 김극기, 강혼의 ‘황산강’ 노래와 함께 필자는 1989년 2월 역사문화지 『가야』창간호에 실었던 ‘낙동강’을 다시 옮겨 본다.

 

낙동강


머나먼 옛날부터 흘렀습니다.

한반도의 척추

태백산맥 황지에서 근원이 되어

크고 작은 마을을 적시며

흘러 흘러 일천삼백 리,

흐르기를 수 천 수 만 년

우리를 살찌웠습니다.

 

나일강이 이집트문명을

인더스강이 고대 인도문화를

황하강이 중국문명을 낳았다면

낙동강은 한민족의 독특한 가야문화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어제도 오늘도 우리 곁에서

쉼 없이 흐르며

흐름의 진리만을 말없이 실천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흐름의 진리 속에서

우리의 젖줄로 생명선의 책임을 다한

낙동강의 위대한 어제를 찾고자

가야의 누각을 지었습니다.

 

낙동강이 마르지 않고

낙동강이 잠자지 않기를

우리는 낙동강이 낳은 민족 고유한 유산

가야왕국을 찾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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