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가야의 종주국 가락가야

김종간 향토사학자.

5. 소지마립간 권 제3

① 3년(서기 481)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는 것을 추격하여 니하 서쪽에서 격퇴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② 18년(서기 496) 봄 2월에 가야국이 흰 꿩을 보내 왔는데 꼬리 길이가 5척이나 되었다.

 

6. 법흥왕 권 제4

① 9년(서기 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의 이누를 보냈다.

② 11년(서기 524)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국경으로 개척한 땅을 순행하는데 가야국 왕이 찾아와서 회합을 가졌다.

③ 19년(서기 532)에 금관국 임금 김구해가 왕비와 그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 아들 무력과 나란히 창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로서 대우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어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또한 『사기』의 권34 잡지 지리1에는 “김해소경은 옛 금관국으로 또는 가락국 또는 가야이다.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세기 구형왕에 이르렀는데 양나라 중대통 4년(서기 532) 신라 법흥왕 19년에 백성을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이에 그 땅을 금관군으로 했다. 문무왕 20년(서기 680) 영륭 원년에 소경이라 하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김해경이라 했는데 지금의 금주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두 번째

 
이상의 기록이 최고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야’ 관련 내용이다. 그런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이름은 한가지인데 가야는 금관국, 가야, 가라 등 여러 이름으로 적고 있으며 「잡지」에서는 금관국의 김구해가 항복해온 것을 적으며 가락국 또는 가야로 또 다르게 적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그 이유를 밝히기는커녕 추측의 자기주장만 난무하다. ‘가야’의 한 자 표기는 ‘加耶’로 통일하고 가야의 본향인 김해는 ‘금관가야’로 표기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가야제국은 6가야라 그 지역을 표기하면서 금관가야로 표기하고 있다. 『사기』에 가야의 국명이 통일 되지 않는 것은 편찬과정에서 김부식과 여러 학자가 그 당시까지 발행된 여러 역사서를 수집해서 그것을 참고하고 간추려서 기술하면서 나라이름을 통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의 「신라본기」를 집필하면서 “김구해왕의 항복을 받은 법흥왕이 본국을 ‘금관군’으로 했다.”는 기록을 보고 그 지역을 금관국으로 표기한 것은 아닐까.

 탈해니사금 때인 77년 8월 아찬 길문이 싸웠다는 ‘가야병’은 그 전장이 황산나루 어귀였다는 점으로 볼 때 의심의 여직 없는 김해지방의 가야였다. 또한 지마니사금 때인 115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치려고 황산하를 지날 때 가야인의 습격을 받아…” 역시 김해지방이다. ‘황산나루’ ‘황산하’ 등은 낙동강의 김해와 양산 사이 구간에 대한 별칭이기 때문이다. 금관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가야제국의 종주국이었던 가락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신라의 자치주 이름이었다. 금관의 뜻은 벼슬을 했던 김수로의 후손과 그 백성들이 살아가는 고을이라고 법흥왕이 내려준 것이다. 쇠를 잘 다루는 가야인들을 나라 잃은 슬픔을 금관이란 이름으로 까지 달래주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유사』의 「가락국기」는 나라 이름을 ‘가야’ 또는 ‘대가락국’ 이라 적고 있으나 『사기』의 「잡지」에는 ‘가락국’ 또는 ‘가야’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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