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가야의 종주국 가락가야

김종간 향토사학자.

 고려라는 통일된 왕권 단일국가가 탄생하기까지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 등 각 나라 각 지역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를 모아 참고하고 또 살피며 보완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는 산지의 기록이요 승자의 기록이라 승자 중심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야’를 기록한 『삼국사기』『유사』는 최고의 역사서인 것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건국 연대를 무엇 때문에 소급하여 기술했을 것인가. 오히려 가야의 우월함을 낮추고 줄이고 빼면서 만들었지 않았을까. 꼭 왜곡하여 기술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몇 자, 몇 줄, 몇 번 기술 되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 한 자와 한 줄에서 왜 등장하고 그렇게 밖에 기술되지 않았는지 학계가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또한 잘못 기술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왜 가야사에서만『삼국사기』의 기록마저 무시하고 깊은 연구를 위한 읽기까지 거부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사기』에는 ‘가야’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기』의 「신라본기」에 실린 가야 관련 기록을 살펴본다.

 

1. 탈해니사금 권 제1

① “…처음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이 괴상히 여겨 취하지 않았다.”(DC 13년)

② 21년(서기 77)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병과 황산나루 어귀에서 싸워 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 파사니사금 권 제1

① 8년(서기87) 가을 7월에 명령을 내리기를 “부덕한 짐이 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는데….

② 15년(서기 94) 봄 2월에 가야의 적병이 마두성을 포위했다. 아찬길원은 장수로 삼아 기병 1천을 보내 격퇴시켰다.

③ 17년(서기 96) 9월에 가야인이 남족 변경을 습격해 왔다. 가소성주 장세를 보내어 막게 했으나 적에게 살해당했다. 왕이 화가 나 용사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물리쳤다. 사로잡은 포로들이 매우 많았다.

④ 18년(서기 97)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치려고 하자 그 국왕이 사신을 보내와서 사죄하므로 이에 그만두었다.

⑤ 23년(서기 102) 가을 8월에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하여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로울 것이다” 하고는 불러서 물었다. (서기 102년 수로왕 나이는 61세.)

⑥ 27년(서기 106) 봄 “…3월에 압독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에게 가야를 치라고 명령했다.”

 

3. 지마니사금 권 제1

① 4년(서기 115) 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치려고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양산과 김해 사이 강)를 지날 때 가야인들이 숲속에 군사를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그런 줄 모르고 곧장 앞으로 가다 복병이 튀어 나와 여러 겹으로 둘러 싸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우며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② 가야를 치면서 왕이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려서 그만 돌아왔다.

 

4. 내해니사금 권 제2

① 6년(서기 201) 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청했다.

② 14년(서기 209) 가을 7월에 바닷가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가라를 침범함에 가라왕자가 구원을 청해왔다.

③ 17년(서기 212) 봄. 3월에 가야가 왕자를 보내어 왔는데 볼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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