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가락국 시조릉

김종간 향토사학자.

 수릉군과 제전이 있으며 세종임금이 병인년에 두 릉 둘레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우고 북돋아 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

 무슬년에 능이 저절로 무너짐에 계청하여 고쳐봉토하고 갑오년에 부사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고 봉식하라 하였고, 정종 경자년에 치제하고 비석을 고쳐 세웠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네 번째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릉에 대한 많은 기록들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가 근원일 것이다. 아름답고 신비롭게 전해온 사서에 후인으로서 감사하며 옛 선비들의 수로왕릉에 대한 시를 찾아본다.

 가야의 종주국인 가락국의 고토 김해에 전해지고 있는 옛 가야의 노래들은 대개 한 시이다. 가야국, 가락국, 금관국, 금관가야, 가락가야 등의 기록이 들어있는 한시들은 『김해읍지』에 주로 수록되어 있다. 「읍지」는 인조때의 경오년에 편성되고 순조 임진년에 증보하였고, 일제시대인 1929년 마지막으로 발행되었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께서 우리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지만 인조와 순조때는 물론 1929년 『읍지』역시 모두 한문이다.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감시 하에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우리의 모든 역사 기록물이 한문이요, 한시임은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의 여인들은 한자를 배우거나 쓸 수 없었고, 반대로 사대부가의 남자는 한글을 몰라야 했고 한자로 글 짓고 시 쓴는 것을 자랑했음을 돌아보면 슬프고 부끄럽다.

 한시를 살펴보기 전에 덧붙이는 이 잔소리는 한자로 된 시를 우리글로 노래함에 있어 그 해석의 잘못을 살펴주시기바란다는 양해의 뜻을 겸한다. 이미 『읍지』를 비롯 많은 분의 역문을 스승으로 삼고 필자의 가슴을 더했다.

수로왕릉-서거정

금릉왕사여수론

천교유존수로분

구지곡종인불견

가야금재묘감문
 

동타고리산여극

옹중유서수사운

백윤십년능향국

가련황롱기사훈
 

금릉의 지난 일을 뉘와 더불어 논할까

오랜 세월에 수로왕 봉분만 남았네.

구지가 끝났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가야금으로 하늘의 묘한 곡을 듣는다.
 

동타 옛 마을에 산은 창날 같고

옹중의 옛 터 나무는 구름 같구나.

백 육십년을 능히 재위했으니

가련타, 거칠어진 능에 석양은 몇 번이나 비쳤던가?

 작가 서거정은 세종 2년에서 성종 19년의 인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뛰어난 학자, 본은 달성이고 호는 사가정, 1438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1년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한 후 많은 관직을 거쳤다. 조선 초 세종에서 성종까지 여섯 임금 아래 45년간 봉직하며 문병을 장악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시에 능하였고 1481년 『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였고 1485년에는 『동국통감』57권을 완성했다. 『동문선』『경국대전』등도 공동 편찬하였다.

 조선 초기에 문신으로 학자로 많은 일을 했던 작가가 김해를 찾아 수로왕릉과 금강사에 대한 시를 남겼음을 볼 때, 경승지 김해를 생각하기 전에 가락국을 상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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