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이에 명을 내려 옛 산성을 수축하여 넓고 튼튼하게 하였다. 돌을 포개어 굳게 하고 산세를 이용하여 높게 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아래에서 바라보니 우뚝 솟은 성벽이 천길이라 한 사내가 문을 막아서면 많은 장정일지라도 성문을 열수 없을 테세였다.

 김해부 사람인 통헌대부 배원룡 공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청하기를 “산성을 수축한 것은 만세의 이로움이오. 우리 부사를 아는 사람으로 공과 같은 사람이 없으니 감히 기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내 생각으로 위험한 곳에 변고를 대비하여 설비를 하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도일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은 이를 바탕으로 다스렸다.
맹자는 천지는 아무리 좋아도 지형이 좋은 것만 못 하고 지형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 했으니 경중대소의 차이를 말한 것이라 그중에 하나만 필요하고 둘은 없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 조종께서 창시하신 법이 역시 치밀하였다.

 내 일찍이 삭방에서 비장으로 동북의 변방을 살폈다. 옛 산성은 산천을 가로질러 처음부터 끝까지 천리인데 그 사이의 요해 지역을 순찰하고 지키기 위해 주둔한 곳이 천이요 백이었으니, 당시에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계획한 자취를 대략 볼 수 있었다.
지난 날 거란∙금∙원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적으로 몇 해를 항전하면서 옛 것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른 것이 어찌 우연의 소치이겠는가? 이제 나라가 군사를 부린 것이 20여년인데, 헐리고 무너져 태평하여 전쟁이 없는 세상과 다름없다.

 이제까지 계책을 세운 신하와 지혜로운 장수의 계획이 실수한 것이 없건만, 어찌 성과 해자가 도적을 방어하는 것인 줄 모른단 말인가. 돌아보고도 버려두고 하지 않으면 그 뜻은 장차 긴 창이나 굳센 노로 적과 평원 광야에서 싸워 오랑캐를 베어 다 멸하는 것만을 마음에 족하다 하고 저 험한 곳에 적을 방어하는 시설을 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졸렬한 계책이라 할 것인가?
왜구의 도둑질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라의 재력이 어렵다고 하면서 그래도 군사는 항시 북쪽으로 출정하여 긴 창과 노로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방책이고 험한 곳 수비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인가.

 아 애석하구나, 거란과 금나라, 원나라를 대적하여 두러워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그런데 지금은 이 좀도둑에게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박후의 축성하는 일은 이에 분노함이리라. 길이 김해의 백성으로 하여금 평상시에는 산성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봉화를 보면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갈 것이니 베개 높이 베고 누울 수 있으리라.
누가 험한 곳에 성을 쌓는 것을 졸책이라 했는가.
내 장차 옛 가야 김해를 찾아 새로운 성위에서 술잔을 들어 박후의 정사에 공적을 이룬 것을 축하하리라.

 

 작가 정몽주는 기문에서 가야고도 김해를 찾아 분산의 성에 올라 술잔을 들고 박 위 부사의 축성을 축하하리라고 했다.
분산성의 기문을 지은 해가 1377년이라 포은의 나이는 40세였다. 정몽주의 기문은 박 위 김해부사와의 깊은 우정도 느낄 수 있지만 그 시대 고려를 노략질한 왜구와 특히 김해부에 대한 왜구들의 침략 행위가 얼마나 극심하고 악랄했는지 짐작케 한다.

 「고려사」에서 “왜구의 최초 침략은 고종 10년(1223) 5월로 금주에 입구하였다.” 로 적고 있으며 충정왕 2년(1350) 과 고려 우왕때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고, 왜구가 많이 침략했을 때는 선박이 200척에서 1500척에 달했고 보통 2척에서 30척이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을 약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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