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가야의 종주국 가락가야

김종간 향토사학자.

 『사기』는 어느 부분에도 어떤 사서나 기록을 참고 또는 인용했다는 기술이 없다. 그러나 일연선사는 『유사』를 편찬하면서 우리 민족의 시원사를 실었으며 특히 「가락국기」는 그 머리에 "고려 문종 대강 연강에 금관지주사인 문인이 편찬 한 것을 간추려 싣는다." 고 밝혀 두었다. 큰 스님 이전에 학자요 문인의 양심을 다했다.

 아쉽다면 필자의 못난 주장일지나 '가야'를 '가야'로 고쳐 적었다는 점이다. '더할 가'를 '절 가' 로 고쳐 적은 것은 불교나라 고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사기』는 가야국의 존재를 최대한 줄여서 다루었고, 금관국으로 표기한 것은 수로왕과 마지막 김구해 왕을 다루면서다. 신라에 항복한 가야를 폄하하고자 법흥왕이 가야를 병합하고 그 지역을 자치주 금관군으로 한 사실을 착각하고 나라이름을 금관국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금관국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가야'또는 '가락국'을 김해지역 고대국가의 이름으로 '가락'은 김해지방의 가야 이름이다.

 역사는 어버이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사서요 그 이야기 시대의 주인이었던 어버이들이 삶을 함께 한 물증이 유적유물이다. 그 이야기 시대를 기록한 문헌은 당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세월의 흐름 속에 멸실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 줄의 기록이 중요하고 한조각의 토기가 중요한 것이다.

 특히 당시의 기록은 우리글이 아닌 중국의 글이라 쉬 해석하고 쉬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그 내용에 큰 오류를 남겼다. 필자는 오랫동안 중국 사서에 기록된 '개의 나라 구야국'을 '구지가'를 근거로 한 '거북의 나라 구야국'으로 바로잡자고 주장해 왔다.

 「가락국기」는 서기 42년에 가락국을 세웠다고 전했다.

 양동리유적은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 '삼국시대'까지의 가야유적"이라고 발굴조사단은 밝혔다. 가야 5백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에서 '4국시대'까지로 바로 잡아야 한다. 많은 학자와 학계는 가야의 실존을 가장 확실히 하고 그 위상을 높이고 밝힌 유적으로 대성동 유적을 꼽고 있다. 가야문화연구회가 당시 부산 경성대학교 신경철 교수께 부탁과 압력(?)을 넣어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기에 감회는 언제나 특별하다. 신교수의 고고학적 용단 덕분에 가야사가 뜨거운 감자에서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학문으로 자리 잡았음을 숨길 수 없다.

 대성동유적이 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대라고 밝혔다고 해서 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병합 된 것이 거짓이 될 수는 없다.

 많은 학자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신뢰하면서도, 거기에 포함되니 가야와 신라의 기록은 왜 믿지 않으려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를 읽어는 보았을까? 더더욱 이해할 수 없고 아픈 것은 우리가 믿을 수 없다고 그렇게 외쳐왔던 『일본서기』를 인용(?)까지 해서 "가야는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압박과 침략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가슴이 떨리는 것이 아니라 피눈물이 쏟아진다.

 가야의 멸망을 우리의 『삼국사기』「신라본기」와 『삼국유사』에서 읽어보고 생각해보자.

 신라는 왜 가락국을 멸하면서 가락국의 왕과 그 일족을 처단하지 않았을까? 멸족과 처단은커녕 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철의 왕국, 해양왕국의 기술과 경험을 신라의 국력으로 흡수하여 통일의 밀알로 삼았던 것이다. 낙동강과 남해안의 풍부한 어자원과 철기 제작기술은 신라통일 초석이 되었을 것이다. 가락국 왕족의 인덕정신과 그 백성의 쇠를 다루는 기술, 말을 다루는 지혜가 신라의 화랑을 발전시키고 김유신의 용맹으로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우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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