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제5장 가락국 주산 분산

 앞의 3인은 죽은 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대원군으로 추증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은 1863년 12월 고종이 12살로 왕위에 오르고 바로 대원군에 봉해졌으니 힘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조선왕조를 뒤흔든 일들이 많았다. 학자에 따라 그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만큼 공과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당색과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한 점,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한 균일 세법 도입 등은 선진적인 정책이었다. 당시 최고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일파를 제거하여 세도정치를 분쇄하였고 당쟁의 뒷 조직이었던 서원을 전국에 49곳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서원은 처음 출발과는 달리 지방 양반 토호들의 근거지로 백성들에게 세금까지 거두기로 하였다. 서원철폐는 토착비리 근절과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였으나 지방 교육제도의 약화라는 주정적 측면도 있었다.
 
 경복궁 중건은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힌다. 전국의 거목과 거석을 징발하고 부역을 강제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고, 건설비를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물고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 건국의 태조가 1395년 지었던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1867년 중건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음은 흥선대원군의 힘이기도 하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8천여 명을 학살한 천주교 박해, 쇄국 양이 정책 등으로 열강을 자극하는 가운데서도 비변사를 폐지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조선조의 병조는 지금의 국방부에 해당했으나, 외적의 침입 등과 관련한 국방 대책은 비변사가 맡았다. 즉 비변사의 폐지는 국가적인 무장해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현석 김해부사가 1870년부터 1873년까지 김해부사로 재임하면서 분산성을 다시 쌓았고, 이듬해 분산 정상에 흥선대원군 불망비를 세워 축성을 지원해 준 것에 감사의 뜻을 새겼으니 이 역시 김해의 소중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만장대에 근접한 동남쪽 봉우리는 타고봉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타고루가 있어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왜구가 침입하면 그 북을 쳐서 김해 부민들 중 노약자를 이곳 산성으로 피난시켰다.

 지금 그곳에는 타고루 아닌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분산성은 지금의 복원된 모습으로 국가사적 제66호로 지정된 것이 아니다. 역사와 문화재는 복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제를 바르게 찾고 지키는 일이다. 그래야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아름답고 거룩한 유산이 되어 빛을 내게 된다.

 분산성의 특징이자 값은 산 정상의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음으로써 성의 최고  관문인 남문이 없이 동, 서, 북만 있는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형태를 지닌 성이다. 비록 그 면적은 좁지만 우물을 만들어 피난성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왜구를 막는 전투성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어른과 병든 자들을 미리 피신시켜서 안전하게 병화를 넘기게 한 효의 성이기도 했다.

만장대 - 허 훈

석저취회만리풍
소소목엽하장공
거등편석강성리
서복청산무기중

천지동남형승광
간성주책고금동
부생백일여생한
경궐은대신식통

신발 아래로 만리풍이 불어오고
나뭇잎은 쓸쓸히 먼 하늘에서 날아온다.
거등왕 조각돌은 강물 소리 속에 있고
서복의 청산은 안개에 숨어 있다.

천지의 형승은 동남으로 광활하고
국방을 성으로 막는 계책은 고금이 같더라.
덧없는 인생 살아 있는 편지 같아
대궐의 승정원에 소식이 통하리라.

 작가 허 훈은 『읍지』 서사 조에 경기전 참봉으로 적고 있으며 생몰년 등은 알 수 없다.

만장대 - 배 전

천향사리불등홍
만장대전수박공
장사임풍취옥적
일성요낙백운중

향기좋은 절에 부처님 등불이 붉고
만장대 앞 물은 하늘을 친다.
장사가 바람 속에 부는 옥피리
한 가닥 소리로 흰 구름 속으로 흩어져 간다.

 작가 배 전은 『읍지』가 전하기를 조선 후기의 인물로 문예와 문필가로서 많은 시를 남겼다. 작품 속의 절은 『읍지』 불우 조의 속에서 적고 있는 해은사로 분산성 안에 있다. “승군을 두었으나 지금은 폐함.”이라고 덧붙였다.
승군은 분산성을 관리하는 군역과 성곽의 보수 관리, 최고의 임무는 봉수대와 타고루를 빈틈없이 지키는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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