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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남명은 이 상소문에서 국가는 썩은 고목나무같이 되어 비바람만 불어도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국가내부의 부패가 만연하여 외침이 있으면 큰 일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종 때부터 다시 여진속이 발호하고 을묘왜변등으로 왜인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은 때이고 보니,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있을 것을 예고한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바로 이러한 논지는 내치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 밖으로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 내치의 구체적 부패상에 대해서 남명은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김해 남명 선비정신 문화를 찾아서
김해일보
2020.09.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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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성이 나라의 근본인간이 인간을 지배통치하는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누구에게 귀속 되느냐 하는 기준은 역사적인 시대변천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또는 정치구조에 따라 다르게 주장되어 왔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정권의 소단위 정치구조로서 고대의 성읍국가나 도시국가 에서는 권력자체가 노예를 제외한 일반 민중들의 합의와 그 필요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으로 도출되어, 왕이나 부족장에게 통치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으가진 왕이나 부족장은 그것을 갖도록 한 민중에게 당연하게 그들을 위해 정치를 하여야 하는 의무를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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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8.2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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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조남명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에 대해 의심을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도 정포은의 한 죽음은 자못 가소로운 것입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30년이나 하였으니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것은 신우부자를 섬겼으니 옛 성현의 도리에 가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추방하는데 참여한 것은 무엇입니까? 10년을 신하로써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가한 일입니까? 만일 왕씨에게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이 제위에 오름으로 영씨 나라가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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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8.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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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이 세상의 가치관의 혼돈과 오도된 모든 휴척은 사실 출처와 인물포폄에 기준이 없고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학자와 관료의 책임이다. ‘세상 천하의 근심이 곧 나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천하만민들보다 그 근심을 앞서서 하는 것(북송 때 범중엄의 말)’이 유학자의 올바른 모습이 아닌가? 다시 말해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선비는 태평세월이라도 항상 우환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남명과 그 제자 그리고 남명학파의 사상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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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7.2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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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이와 관련하여 남명이 명종의 제갈량에 대해 물은 것과 연결된 견해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제자이며 외손서였던 김우옹은 남명의 언행록에서 “선생은 ‘일찍이 제갈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때에, 벼슬을 하고자 한 것이니 작게 쓰였다는 아쉬움을 면하기 어려웠다. 만약 끝까지 유비를 위해 일어서지 않고 차라리 융중에서 늙어 죽어서 천하후세에 제갈공명의 사업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또한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셨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이 문제는 남명의 출처사상과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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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7.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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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그런 의미에서 남명이 평생 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학의 실천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남명이 단순히 쓸데없는 고집이거나 실제로는 현실정치를 제대로 할 능력도 없으면서 스스로 공자가 말하는 유학의 출처사상에 의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후일 문묘에 종사되어 존경을 받은 회재 이언적이나 퇴계 등의 인물들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 등 도학정치를 표방한 개혁 세력들이 숙청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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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7.0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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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남명 정신이 다른 유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같은 시대적 아픔을 스스로 체득하고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55세에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아픔을 지적하고 국왕의 덕치를 강력히 호소한 것이나, 69세에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자 머지않아 이 땅에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그 방비책을 논구하게 한 것은 그 좋은 증거이다.공자와 안연의 학문에 보이는 실천적 모습을 읽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남명정신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그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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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6.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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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진리탐구는 인간 본연의 자세로 지적 호기심이 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존양과 성찰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 유학의 교학적 목적이자 태도이다. 이렇게 볼 때 남명은 "학문을 하는 것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서 놓을 수가 없다. 모름지기 힘을 써서 당겨 올려야 하며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전진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씩 전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경' 이라는 것이다.공부하는 일은 언제나 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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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6.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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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선유는 '경으로 한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고, '이 한 자가 곧 지극히 요약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이라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과 근사한 것으로, 항상 엄숙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방일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늘 보전되어 학문이 진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학문은 가장 두려운 것인데, 잠시라도 쉬게 되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옛사람도 이를 근심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학문하는 방도는 방일한 마음을 거둬들이는 데에 있고, 방일한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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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6.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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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위의 글에는 하학위주의 남명 실천정신에 대하여 간명하게 기록 되어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 체득하여 일상생활에 적용이 용이한 공부를 투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남명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계발시켰으므로 그의 영향 역시 컸다고 하였으니 남명의 영향력 역시 짐작할 수 있겠다. 이같은 계발과 영향이 당시 정치의 비판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실록은 적고 있다. '남명의 기개는 고결해서 속된 풍속에 더럽혀질세라 늘 경계하였지만 현행정사에 대한 근심은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라는 기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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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6.1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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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남명은 상소문에서 언로의 개방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재야학자로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정치적 경륜을 학문적인 성격으로 풀어 나간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이 상소문에서는 교육적인 요소 또한 내포되고 있다고 하겠다. 로 널리 알려진 이 상소문은 조정의 안팎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사관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 평가를 요약해 보자.① 조식은 시골에 묻혀 있는 선비로 어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벼슬을 가벼이 여기지만 왕과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스런 마음을 지니 까닭에 글이 곧고 문제를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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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6.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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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여기에 의하면 퇴계가 남명과 더불어 한 시대에 예안의 도산에서 강학과 도를 논하여 학문을 크게 천명하고 도와 덕을 이루었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주자라고 하면서, 남명에 대해서는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선비'라고 평하고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남명과 퇴계의 양 문하에 출입하였던 한강 정구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이같은 사정이 적용되었다. 《광해군일기》에서는 정구가 일찍이 남명에게 공부하고 또한 이황에게서 공부하였다고 하면서 그 친구 김우옹이 타계했을 때 지은 만시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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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5.2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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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가) 요사이 남명으로부터 온 이의 말에 의하면, 호남 기사문(기대승을 말함)이 일찍이 황과 더불어 사단칠정을 논한 서찰을 주고받은 것이 남명의 극히 옳지 않다고 하며, 심지어 기세도명이라고 지목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약석이며, 이 이름은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나) 마침 남명은 조건중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르기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정차조차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이야기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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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5.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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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4.선비사상과 민본ㆍ외민ㆍ애민정신1) 출처사상과 벼슬살이 문제 유학에서 출처사상은 곧 은일사상과 통하며, 공자가 당시 혼란한 세상을 등지고 산림에 숨어사는 사람들을 말한 데서 출발한다. 즉 '고금의 인물을 제대로 논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출처를 본 연후에 그 기림과 비판을 논하여야 한다'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자는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지로운 나라에도 살지 아니하며, 천하세상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 나타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출처라는 것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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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5.0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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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정신의 뿌리이어서 계속>>>덕성함양이 교학의 목적이라면 현실에 대한 비판과 판단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격물치지이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도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치지는 격물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반성적 사고를 요구한다. 자신을 닦아 가는 수기지학 역시 도덕적 인간완성에 그 목덕을 두고 있으니, 인간완성의 과정 속에서 부단한 경의 실천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남명은 경이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이면서 마음을 수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보고, 배우는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은 심지를 굳게 하는 일이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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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2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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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 경이라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과 근사한 것으로, 항상 엄숙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방일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늘 보전되어 학문이 진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학문은 가장 두려운 것인데, 잠시라도 쉬게 되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옛사람도 이를 근심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학문하는 방도는 방일한 마음을 거둬들이는 데에 있고, 방일한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 것은 반드시 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요약된 것이다." 이같은 김우옹은 남명에게서 배운 '경'을 선조에게 거침없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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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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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유학의 교육은 서양의 교육론과 다소 차이가 있다. 가르치면서 행하고, 행하면서 배운다는 취지에서 볼 때 자신을 수양하는 수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명의 교학내용은 《학기》 에 가장 많이 실려 있다. 이 책은 남명이 성리학을 탐구하면서 함양한 공부의 주요 학습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남명은 일찍부터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면서도, 산사에서 독서를 통해 선인들의 언행을 고찰하였다. 따라서 《학기》 는 선현의 사상을 스스로 깨달아 얻은 바를 자신의 사상으로 체득한 학문적 의지의 소산이라 하겠다. 《학기》에서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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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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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늘 말하기를 "요사이 초학자들은 고상하고 심원한 학문에 대해서는 말하기 좋아하나 집안 거들 줄을 모르고 인사말 할 줄도 모른다. 먼저 《계몽》 이나 《태극도》 같은 책을 배우기는 하나, 자신의 몸 수양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고 결국 빈 이름만 띠게 된다." 라고 하였다. 한 번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런 폐습을 없애자고 하였다. 또한 언론이 매우 활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잘 계발시켰으므로 듣는 사람들 치고 결심을 다지면서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듯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영향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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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0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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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첫째, 남명의 상소문은 바르고 간절하기는 하지만 공순하지 못한 말을 대왕대비에게 하였으니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매우 한심스럽다. 둘째,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도 역시 어렵다는 말도 공손하지 못하고 '음악은 슬픈 곡조뿐이고 옷은 흰색깔이니 소리와 색깔에도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라는 말도 불길한 징조다.명종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이라고 한 말은 남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구양수가 황태후를 한 부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옛날 어진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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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0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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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남명은 이 상소문에서 첫째, 국정을 수습하는 방도가 구구한 정사나 형벌에 있기보다는 통치자의 올바른 경륜과 판단에서 풀리게 된다고 하여, 학문을 통해 치국의 방도를 밝혀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학문 안에는 왕의 자질을 덕으로 다듬어 줄 수 있는 방도가 있어서 그로 인하여 백성을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둘째, 정사가 한 사람에게 달린 체제에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왕이 마음으로써 신심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도 했다.남명은 상소문에서 언로의 개방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재야학자로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정치적 경륜을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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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2020.04.09 1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