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그런 의미에서 남명이 평생 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학의 실천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남명이 단순히 쓸데없는 고집이거나 실제로는 현실정치를 제대로 할 능력도 없으면서 스스로 공자가 말하는 유학의 출처사상에 의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후일 문묘에 종사되어 존경을 받은 회재 이언적이나 퇴계 등의 인물들이 같은 시대에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 등 도학정치를 표방한 개혁 세력들이 숙청 당하고 명종년간까지 훈구척신파에게 농락 당하여 민중이 도탄에 빠진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의 벼슬살이는 민중을 위해 도를 실천하는 정치를 시행하기보다는 개인과 가문의 영광과 안락을 위해 벼슬과 재물을 탐하는 형태로 될 것이 뻔했다. 실제로 당시 다른 인물들의 벼슬살이에서 그런 모습들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명은 여러 차례 왕의 벼슬살이에 대한 부름을 받았어도 계속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그에 따라 윤씨의 오빠이고 훈척파로서 당시의 정치를 파탄시킨 원흉인 윤원형도 실각하자, 이듬해 10월(1566년, 66세)에 비로소 한번 소명에 응하여 포의로서 사정전에 직접 왕을 면대하였다. 그 때 그는 왕과의 문답에서 군신간을 붕우관계로 보고 올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왕 스스로 학문의 경지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등 실질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그리고 명종이 제갈량과 유비의 이른바 ‘삼초고려’에 대해 물어, 초야에서 일어나 벼슬하기를 촉구한 듯하나 유비에게 비길 수 없는 명종이듯이 남명 스스로가 제갈량처럼 쉽게 출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남명이 바랬던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태공망이 주나라 문왕에게 말한 바대로 “군자는 뜻이 같은 임금을 만나야 친근하게 마음을 합할 수 있고, 마음을 합하여야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사실 명종은 당시 20년간 모후인 문정왕후의 치맛자락에서 기를 펴지 못하였고, 명종이 남명을 직접 대면한 당시에는 모후가 죽고 난 후여서 비록 정치간섭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마음을 합하여 일을 펼쳐나가기는 부족한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지만 마음을 합하여 일을 펼쳐나가기는 부족한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명은 그 다음날 명종의 문약함을 탄식하며, 시세를 타고나지 못했음을 절감하고 다시 낙향하고 말았다. 더구나 명종은 그 이듬해(1567년) 6월에 죽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