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이 세상의 가치관의 혼돈과 오도된 모든 휴척은 사실 출처와 인물포폄에 기준이 없고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학자와 관료의 책임이다. ‘세상 천하의 근심이 곧 나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천하만민들보다 그 근심을 앞서서 하는 것(북송 때 범중엄의 말)’이 유학자의 올바른 모습이 아닌가? 다시 말해 정치가는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태평세월이라 하고 학자선비는 태평세월이라도 항상 우환의식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남명과 그 제자 그리고 남명학파의 사상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그들의 현실인식과 출처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남명은 엄광과 길재에 관한 논전을 지어 스스로의 출처관을 투영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 엄광은 후한 광무제가 즉위하자 그를 찾아내어 간의대부를 제수하고 도와줄 것을 청했으나 벼슬에 나오지 않고 부춘산에 은거하였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로 은둔지사의 풍이 유행하였다. 이는 지배상층부의 타락과 정치의 난맥상으로 벼슬해 보았자 이름만 도둑 맞고 이용되어, 끝내는 죽임을 당하는 세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명은 〈엄광론〉에서 “나는 엄광을 성인의 무리라 한다. 왜냐하면 옛날 맹자가 제후를 만나보지 않으면서 한 자를 굽혀서 한 심을 곧게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바인데 하물며 한 자를 곧게 하기 위해 한 심을 굽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는 위로 천자에게 신하노릇 하지 않고 아래로 제후와 벗하지 않는다. 상탕은 이윤을 삼빙하여 스승으로 삼았고, 주문왕은 여상을 몸소 찾아가서 맞이하였는데, 광무제는 엄광을 찾아가지도 않고 한 번 불러서 신하로 삼으려 하였다는 데서 광무제의 현인을 대하는 모습을 남명은 비판한 것이다.

남명은 그러면서도 자신은 엄광이 세상을 잊은 태도와는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명은 “엄광과 나는 그 도에 있어서 같지 않다. 나는 세상을 잊지 않았고 공맹의 말씀을 배우려 한다.” 라고 하여 유학자의 ‘수기치인’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출처에 신중하였던 것이다.

또한 남명은 “만약 엄광이 성탕과 고종같은 인군을 만났더라면 또한 어떻게 바위구멍에서 늙어 죽고, 동강에 낚시질하는 일개 늙은이로 되었겠는가?” 라고 하여 당시 유약한 외척정치라는 혼탁한 시대상황에서 자신의 포부와 그것을 펼쳐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운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성현이 임금과 민중에게 마음씀은 한 가지이나 그 시대를 만난 때가 행, 불행이었던 것이다.” 라고 하여 그 시대에 벼슬살이 하지 않았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고려의 망국, 그리고 조선의 개국과 관련하여 그 출처를 이야기 할 때 길재를 꼽는다. 당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변하는데, 산림에 은거함으로써 유교의 출처하는 바른 모습을 보여준 것은 가히 후세의 모범이라 하겠다. 남명은 여말선초의 길재를 흠모하여 <야은길선생전> 을 지었다. 남명과 이황 양문의 제자인 정구가 이황과 질문논쟁을 하여 길재의 출처를 정몽주보다 우위에 놓고자 한 남명의 의견을 대변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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