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여기에 의하면 퇴계가 남명과 더불어 한 시대에 예안의 도산에서 강학과 도를 논하여 학문을 크게 천명하고 도와 덕을 이루었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주자라고 하면서, 남명에 대해서는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선비'라고 평하고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양 문하에 출입하였던 한강 정구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이같은 사정이 적용되었다. 《광해군일기》에서는 정구가 일찍이 남명에게 공부하고 또한 이황에게서 공부하였다고 하면서 그 친구 김우옹이 타계했을 때 지은 만시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퇴계의 정맥, 산해의 고풍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남에는 선비가 많은 곳인데 퇴계 이후로는 참된 선비로서 우뚝하게 사표가 될 만한 자가 없다고 하고 있다. 퇴계가 남명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영남을 거론하면서 퇴계만을 지칭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정치적 성패와 학문적 평가가 밀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퇴계가 남명의 학문 성향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영남 사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면에 두 분이 마음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이면적 허여를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다양하다. 역시 《광해군일기》에 퇴계가 남명과 더불어 비록 왕래하며 상종하지는 않았으나, 서로 허여하고 그 훌륭한 점을 취한 것이 자못 깊었다고 하면서 주고 받은 편지나 들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퇴계가 남명에게 '애가 그와 더불어 신교를 나눠온 자 오래이다' 또는 '평소 흠모하기를 깊이 한 바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남방의 높은 선비로는 오직 이 한 사람을 꼽는다' 라고 하였다. 남명 역시 퇴계에게 편지하여 '평소 존경해 온 마음이 하늘에 있는 북두칠서만큼 크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명과 퇴계가 진심으로 서로 흠모하였던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남명과 퇴계는 이처럼 '백년의 신령스런 사귐' 혹은 '천리의 신령스런 사귐은 고인도 숭상하던 바' 라고 하면서 서로 공경하였다. 남명이 71세 되던 해 퇴계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 탄식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에 젖어 들게한다. '같은 해에 나서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이 죽었다 하니 나 또한 멀지 않았구나.' 라는 탄식이 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명의 심정이 어떠했던가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2)남명의 실천정신
1) 상소문을 통해서 본 실천정신
남명은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로 임명받았으나 사절하였다. 이 때 실록의 사관은 "조식은 굳은 절개를 깨끗이 지키고 예법으로 자신을 자제하여 영달이나 이욕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품행이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라고 기록하였다. 연이어 기록된 글에는 "조식은 타고난 천성이 강건하고 정직하여 세태에 맞추어 행동하지 않고 자기 지조를 깨끗이 지켰다. 속된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수치심을 느끼고 가 버릴 생각을 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도록 불렀으니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남명은 작은 벼슬에 연연하여 자신의 포부를 거두어 들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명종 10년(1555) 10월 11일 단성현감을 임명받았으나 10월 19일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끝내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상소문에서 남명은 현실인식과 실천적 의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명은 이 사소문에서 첫째, 국정을 수습하는 방도가 구구한 정사나 형벌에 있기보다는 통치자의 올바른 경륜과 판단에서 풀리게 된다고 하여, 학문을 통해 치국의 방도를 밝혀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학문 안에는 왕의 자질을 덕으로 다듬어 줄 수 있는 방도가 있어서 그로 인하여 백성을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둘째, 정사가 한 사람에게 달린 체제에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왕이 마음으로써 신심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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