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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명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에 대해 의심을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도 정포은의 한 죽음은 자못 가소로운 것입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30년이나 하였으니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것은 신우부자를 섬겼으니 옛 성현의 도리에 가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추방하는데 참여한 것은 무엇입니까? 10년을 신하로써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가한 일입니까? 만일 왕씨에게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이 제위에 오름으로 영씨 나라가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몽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종사하여 그 녹을 먹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충신과 역적의 시시비비가 아니라 출처의 구체적 사례를 철저히 구명함으로써 정면론적 명분론과 유학의 실천적 정치사상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조의 쿠데타 이후 광해군 때 벼슬한 이들의 출처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고려말의 정치상황이 수명론적 명분을 지킬 때인가, 아니면 혁명성까지 내포한 정명론적 명분을 지킬 때인가, 아니면 혁명성까지 내포한 정명론적 명분을 주장할 때인가는 이론의 여지가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희가 맹자의 혁명적 정치사상을 부분적으로 지지하면서 내세운, “앞의 임금이 걸주처럼 포악하고 뒤의 임금이 탕무처럼 유덕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왕위찬탈의 구실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과연 우왕과 창왕이 걸주처럼 포악하고 위화도 쿠데타 후에 9공신(이성계, 정몽주, 정도전 등이 포함)이 옹위한 공양왕이 탕무처럼 덕이 있는 임금이었던가? 또한 후일에 역성혁명을 하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유덕한 인물이었던가? 분명 역사기록은 그렇지 않았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이록을 탐하는 훈척파들이 조정에 가득하여도 사림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출처가 분명하지 않고 심하게는 훈척들과 서로 도와 민중을 탐학하고도 부끄러움은 모르고 오히려 상호 후원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그러므로 조선조 유교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는 출처의 비엄정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남명은 구체적인 벼슬살이와 민중을 위한 정치행위와 사회적 실천에는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논의마저 회피하면서도 천리와 인욕 그리고 이기, 사단칠정 등의 사변적인 논쟁을 ‘세상을 속이면서 유명한 선비라는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 이라고 보고 비판하였다.

정인홍은 남명의 출처를 “선생은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 아는 이는 비록 좋아하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못 치우치게 이를 미워하였다. 은퇴하였으나 시대를 자세히 살폈고 스스로를 지켰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자랑하지 않았으며 깎아지른 요새의 높은 바위 구멍에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천 길을 나르는 봉황새라 하면 가할 것이다.” 라고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함은 구차하게 혼란한 세상에 굽히고 나아가 벼슬살이 하려고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유학자로서 세상과 정치의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못 본채 하지 않아 올바른 자세를 지켰음을 말한다. 그래서 쉽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실천을 남명이 행하자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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