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이와 관련하여 남명이 명종의 제갈량에 대해 물은 것과 연결된 견해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제자이며 외손서였던 김우옹은 남명의 언행록에서 “선생은 ‘일찍이 제갈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의해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때에, 벼슬을 하고자 한 것이니 작게 쓰였다는 아쉬움을 면하기 어려웠다. 만약 끝까지 유비를 위해 일어서지 않고 차라리 융중에서 늙어 죽어서 천하후세에 제갈공명의 사업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또한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셨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문제는 남명의 출처사상과 관련하여, 여기에 대한 당시나 후세의 학자들의 의견이 남명과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다양한 역사 정통론에서 주희의 이른바 ‘촉한정통론’을 원·명·청나라 시대와 고려말 이후 성리학의 유행과 더불어 주희의 학문사상과 견해를 추종하고 출처사상의 단순논리인 ‘불사무의’에 입각해 있기 때문으로 본다. 구체적으로 과연 무슨 명분으로 유비의 촉한이 조위보다도 후한을 이은 정통이 있다는 말인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는 이유로 한나라의 역적이니 정통이 아니라면, 중국 역대 왕조의 창업주인 초대 황제는, 평민출신인 한고조 유방과 명태조 주원장을 제외한, 대부분이 앞 왕조의 역적이 되어 정통성이 없는 왕조가 될 것이다. 

그러한 단순논리로 본다면 은나라 탕왕도 주나라 무왕도 역적으로 펌하 · 매도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유학의 ‘역사정통’이나 ‘도학정통’등의 논의자체가 성립되지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리고 삼국은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 의해 선양을 받은 조비의 위나라에 의해 천하통일 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도 신라의 경순왕에게서, 조선의 태조도 고려의 공양왕에게서 선양을 받아 왕조를 개창하였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남명이 제갈량의 출처를 문제 삼은 큰 뜻과 수준 높은 견해 및 날카로운 출처논리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될 줄 알면서 백성과 군사를 동원해서 대량 살상케 하는 것’이 이른바 제갈량의 ‘출사표의 대의라면 곤란하다. 진정 대의명분이 있다면 죽을줄 알아도 당연히 벼슬에 나아가 군사를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제갈량의 출처는 남명의 견해대로 가벼운 것이다. 남명이 제갈량의 발신을 가볍게 보고 비판한 심경과 그 비판기준이 되는 출처사상은 그의 시 ‘덕산의 시냇가 정자의 기둥에 붙여’에서 확연하게 표현하였다고 본다. 

이로 볼 때 유비의 삼고초려는 나라와 제왕들이 ‘현인을 준숭하고 능력있는 자에게 임무를 맡기는’ 일로서는 높게 살만 하고 후세의 귀감이 될지 모르지만, 제갈량의 일어남에 대해서는 남명의 출처에 대한 논의와 사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남명의 차원 높은 사회 · 정치사상은 바로 이러한 유학의 출처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는 특히 현대의 한국사회 정치현실에서 분명한 출처의 기준이 없이 기회주의적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정치가와 학자출신 관료들이나 아무런 비판의 언사가 없이 세태에 추종하는 학자군상들에게 새롭게 큰 교훈으로 남을 수 있다. 

남의 비리와 약점을 내 자신을 위해 이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덕이 없는 짓이고 소인의 행위이지만, 그것을 눈 감을 때 사회에 진실보다는 허위가 판을 치게 되고 역사가 오도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인물됨은 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사청문회를 할 때 출처에 바탕을 둔 기림과 비판을 논해야 한다. 여항의 일개 초부가 아니라 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류거나 당대에 추앙받는 인물일수록 더욱 정확하게 그 출처와 학문사상을 따져 보아야 한다. 그들의 출처와 일거수 일투족의 가치와 진실여부가 다른 사람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해악과 그 혜택이 크게 때문이다. 

또한 그래야 후세에 나타날 안목이 있는 자와 당새에 선배동학들의 춘추필법에 노출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두려움에서 스스로 자각하고, 나아가 이 세상이 맑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물평과 현인으로써 현인을 논평하는 것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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