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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남명의 상소문은 바르고 간절하기는 하지만 공순하지 못한 말을 대왕대비에게 하였으니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매우 한심스럽다. 둘째,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도 역시 어렵다는 말도 공손하지 못하고 '음악은 슬픈 곡조뿐이고 옷은 흰색깔이니 소리와 색깔에도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라는 말도 불길한 징조다.
명종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이라고 한 말은 남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구양수가 황태후를 한 부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옛날 어진 선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공손하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명종은 남명의 상소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승정원에서 죄줄 것을 청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대해 사관은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자라면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바른 글을 올려 시정의 폐단을 직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왕의 언동이 잘못되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남명은 한편으로 상소문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학문적 자세에 대하여 모범을 보이면서 꾸준히 제자교육에 힘썼다. 이것은 그의 실천정신이 다양한 방면으로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이다.
즉 밖으로는 사회에, 안으로는 자신 혹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도 남명의 이같은 실천적 경향을 자세히 적고 있다. 《명종실록》 명종 21년 10월 21일조의 기록은 그 대표적이다.
조식은 집에 있을 때, 관혼상제의 절차를 모두 주문공의 「가례」를 따르면서 시속적인 것과 혼동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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