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남명은 이 상소문에서 국가는 썩은 고목나무같이 되어 비바람만 불어도 망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즉 국가내부의 부패가 만연하여 외침이 있으면 큰 일이 난다는 것이다. 이는 중종 때부터 다시 여진속이 발호하고 을묘왜변등으로 왜인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은 때이고 보니,미구에 큰 전란인 임진왜란이있을 것을 예고한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바로 이러한 논지는 내치의 문란, 즉 국가 안의 부패가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 밖으로부터의 화를 자초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 내치의 구체적 부패상에 대해서 남명은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충성스럽고 뜻이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며 부지런히 애쓰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형세가 이미 극도로 부패해져서 둘러보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고 어제할 줄을모릅니다.신은 이 때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며 계속 탄식하여 낮에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허희  하며 탄식하여 밤에는 눈물을 가리는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자전(문정왕후)은 사려가 깊으시나 깊은 궁궐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가 어리어 선왕의 대를 잇는 외로운 아드님일 뿐이니, 백천가지 천재와 억만 갈래로 흩어진 인심을 무엇으로 수습할 것입니까?" 라고 죽음을각오하고 거침 없이 비판하였다.
특히 왕과 대비에 대한 호칭을 '고아'나 '과부'라고 운운하였지만, 비록 그것이 송대 선인도 사용한 용어라는 근거에서 하여 '임금에게 불경한 죄로 사형에 처해질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왕과 수렴첨정을 하는 대비가 제대로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이 가죽이 벗겨지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왕이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왕답지 못하였으니 남명이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타당하다.
이러한 상소문을 올릴 수 밖에 없는 당시 사회·정치적 현실의 구체적 모습은 남명은 〈민암부>에서도 이렇게 옮고 있다. "궁실을 광대 하게하는 것은 암을 운반해 오는 수레이고 여알(:왕의 총애를 입은 궁녀가그 권세를 이용하여 청탁하는 행위)이 성행하는 것은 암의 계단이고, 세를 거두는 데 기준이 없음은 암을 쌓는 것이고, 사치함이 헤아릴 수 없음은 암초가크게 서있는것이니 이 암초가 비록 민중에게 연유하고 있으나 임금의 덕에서 더 크게 연유함이 아닐 수 없다. 물과 같은 박성이 배인 임금을 받들어 모시지만 물 속에 암초인 바위가 있으면 배는 좌초해서 전복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처럼 당시 현실이 온통 바위를 물 속에 운반하여 크게 쌓고 있는 것과 같아, 잘못하면 왕 자신도 무너지게 된다는 엄청난 경고이다.
이것은 남명이 진리란 정사에 있으며 정치의 근본이란 바로 민중에게 있다는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3) 경세적 실학사상의 원류


유학은 '사람에게 필수적인 학문'을 뜻하기도 한다. 비록 그것이 이론적인 사상체계일지라도 사람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사상, 즉 실학일 때|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실학은 '실사구시의 학문'을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 용어가 처음 문헌에 보이는 것은 《한서》에 '학문을 함에 옛것을 좋아하고,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말에서 출발한다. 유학의 실학사상은 경세사상을 구제하는 사상을 말한다.
남명은 유학사상의 근본 종지라고 할 수 있는 '수기치인에서 치인, 즉 경세적인 실학사상에 학문사상의 중점을 두었고 그 제자 및 사숙인들은 이를 계승하였다. 이것은 유교의 민본적 정치사상과 그대로 통한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시대상황은 남명에게 유학사상이 올바로 적용된 사회가 아닌 것으로 비쳐졌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는 정약용은 16세 때 이익의 글을 접하고 평생 사숙한다. 이익은 그의 부친 이하진과 같은 당색이며 학문사상과 그 경향성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던 허목을 사숙하였다. 허목의 스승은 바로 남명의 고제자인 정구이다. 허목은 조경과 함께 처음에는 정구의 제자인 문위에게 사사하다가 문위의 추천으로 정구의 만년 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경세치용의 실학파인 이익과 정약용 등은 바로 남명과 정인홍 그리고 정구의 학문 경향성과 실학적 요소를 이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 구체적인 것은 유학의 학문사상과 그 경향성에서 주자 성리학에만 머물지 않아, 박학다기하였고, 사회경제적 문제의식에서 공물의 폐해와 이에 관련된 남명학파 인물들의 공통적인 '서리망국론과 이익의 '장리론' 그리고 정약용의 '향리론'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명은 "군정, 민정 등 서정과 나라의 기무가 모두 도필의 손에서 나오니, 한 타래의 실, 한 톨의 밤도 서리들 손에 맡겨서 바치지 않으면 시행되지 않습니다. 안으로 재물은 모일지 몰라도 밖으
로 민중은 흩어져 열 사람에 한 사람이 남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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