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2) 백성이 나라의 근본

인간이 인간을 지배통치하는 정치권력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누구에게 귀속 되느냐 하는 기준은 역사적인 시대변천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또는 정치구조에 따라 다르게 주장되어 왔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정권의 소단위 정치구조로서 고대의 성읍국가나 도시국가 에서는 권력자체가 노예를 제외한 일반 민중들의 합의와 그 필요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으로 도출되어, 왕이나 부족장에게 통치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으
가진 왕이나 부족장은 그것을 갖도록 한 민중에게 당연하게 그들을 위해 정치를 하여야 하는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의무를 소홀히 한 통치자는 당연히
정권의 정통성과 통치행위의 정당성이 없어지므로 선거나 추대 혹은 방별의 방식에 의해 다시 새로운 통치자로 대치될 수 있다.
조선 중기 당시 사림파는 선왕지도에 입각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먼저 유교의 정치적 이상인 민중을 위한 정치로 민심과 그민중의 신뢰를 획득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실천을 하였다. 그러나 수차례 훈척파의 공격으로 사화를 당하자 현실에 대한 우환의식에서 출발하는 민본사상이 이론화되어 관념적인 이기심성론으로 변질되었다.
남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사상적 혼란시기에 사회· 정치현실을 비판하고 궁극적 정치소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그것은 《서경> 과 《맹자》, 《순자> 등에서 나타나는 민본적인 선진유학의 참모습으로 반본하는, 유학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으며 후일 조선 후기 실학의 경세제민적 사회·정치사상과 직접 연결된다.
남명은 구체적으로 그 당시의 정치와 왕실에 대하여 <민암부> 에서 민중을 물 속의 바위 (암초)에 비유해서 읊었다. 그는 '염에되 양자강 구당협 입구에 있는 돌 무더기로 물 밖으로 수십 장 솟아 있는데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여기에 부딪혀 좌초한다고 한다.)'에 배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또한 이 곳에서 전복되기도 한다고 하여 민중에 의해 킨력자체가 바뀔 수 있음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지리적 사물을 이용하여 비유적으로 주장한다. 그리하여 남명은 "민중이 물과 같다 함은 옛날부티 있는 말이다. 민중은 임금을 모시지만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 라고 순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즉 물 이 있어야 배가 떠서 다닐 수 있다. 민증이 있어야 임금이 있고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이 배를 뒤집을 수 있듯이, 민중을 위한 정치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임금은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인 정인홍도 《서경》의 '민중이 오직 나라의 근본' 이라는 말과 《주역》'익'쾌의 '임금을 비롯한 상층계급을 박하게 하고 하층계급인 민중을 후하게 해야 한다'는 말 그리고 "맹자가 양혜왕이나 계선왕에게 누누이 권한 것도 '보민제산의 이야기이다." 라는 말에 이어서 그는 "《서경》에 이르기를 '가히 두려워할 이 민중이 아니겠는가 와 '민중이 바위와 같다'는 말을 반성하고 다스리라." 라고 하면서 남명과 마찬가지로 '민암을 말하고 권력의 원인자를 민중으로 보고자 하였다.
남명은 또한 일반적 이론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혁명적인 정치적 사상을 피력한다. 그는 "걸주는 탕무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나라의 민중을 얻지 못한 데에서 망했다." 라 하여 (맹자>의 <이루> 장과<진심> 장의 두 문장을 합해서 그의 사상을 주장한다. 이는 또한 민중이 국가와 임금보다 귀하기 때문에 민중에게로 귀속되고 민중을 위하는 정당한 권력에 민중 스스로가 마음에서부터 인정할 때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명은 보다 후대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한나라 유계(회주:유방)는 소민이었고 진나라 이세(호해)눈 대군이었다.
그런데 필부가 만승으로 바뀌었으니 대권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오직 우리 벅성의 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히 정치권력인 대권이 민중의 손에 달렸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그의 정치 사상에는 민본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기초적 요소가 함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 왕조 말기적인 사회현상과 정치적 불안과 부정부패가 심하여 그 누구도 비판적인 언사를 할 수 없었을 때 남명은 명종 10년(1555)<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에서 "전하의 나라 다스리는 일이
잘못 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가고, 천의 가 벌써 떠났으며 인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그것은 비유컨대 마치 백 년 된 큰 니무가 그 속은 빌레가 다 파 먹었고 기름과 진액도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폭우가 언제 닥처올지를 알지 못한 데에까지 이른 것이 아득히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왕의 정치행사가 민중에게 근본을 두지 못하여 민심과 천의가 떠났다고 직접 왕에게 상소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권과 왕위 자체를 비판한 죽음을 무릅 쓴 직언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시 유교국가에서 민심이 떠나고 천의가 옮겨졌다면 혁명을 해노 가하고, 그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정치사상에서 민심의 향배는 국가의 존망과 왕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당시 민중이 어육이 된 현실을 직재하게 비판한 것은 유교정치사상의 핵심을 거론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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