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남명은 상소문에서 언로의 개방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재야학자로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정치적 경륜을 학문적인 성격으로 풀어 나간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이 상소문에서는 교육적인 요소 또한 내포되고 있다고 하겠다. <단성현감 사직소>로 널리 알려진 이 상소문은 조정의 안팎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사관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 평가를 요약해 보자.
① 조식은 시골에 묻혀 있는 선비로 어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벼슬을 가벼이 여기지만 왕과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스런 마음을 지니 까닭에 글이 곧고 문제를 바로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② 조식은 자신을 말게 수양하면서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초야에서 살고 있으면서 공명을 얻을 기회가 왔는데도 마다했다. 가난한 살림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지조를 지킨 것이다.
③ 관직을 사양했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정대신보다 더 극렬한 논의로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러니 그 마음이 충직하고 절개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명종은 승정원에 남명의 처사가 못마땅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명종은 남명의 상소문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지적하였다. 첫째, 남명의 상소문은 바르고 간절하기는 하지만 공순하지 못한 말을 대왕대비에게 하였으니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것 같아서 매우 한심스럽다. 둘째,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도 역시 어렵다는 말도 공손하지 못하고 '음악은 슬픈 곡조뿐이고 옷은 흰색깔이니 소리와 색깔에도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라는 말도 불길한 징조다.
명종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하여 당시 사관은 '깊숙한 궁중에 있는 과부의 몸'이라고 한 말은 남명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구양수가 황태후를 한 부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옛날 어진 선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공손하지 못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명종은 남명의 상소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승정원에서 죄줄 것을 청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대해 사관은 군신의 도리를 모르는 자라면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바른 글을 올려 시정의 폐단을 직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왕의 언동이 잘못되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남명은 한편으로 상소문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학문적 자세에 대하여 모범을 보이면서 꾸준히 제자교육에 힘썼다. 이것은 그의 실천정신이 다양한 방면으로 열려 있다는 것에 대한 증언이다. 즉 밖으로는 사회에, 안으로는 자신 혹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도 남명의 이같은 실천적 경향을 자세히 적고 있다. 《명종실록》 명종 21년 10월 21일조의 기록은 그 대표적이다.
조식은 집에 있을 때, 관혼상제의 절차를 모두 주문공의 「가례」를 따르면서 시속적인 것과 혼동시키지 않았다. 제자들은 가르칠 때에는 언제나 《근사록》 과 《성리대전》 과 같은 책들을 부지런히 읽도록 하면서 모두 스스로 체득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입으로 외우거나 하는 것은 탐탐히 여기지 않았다. 늘 말하기를  "요사이 초학자들은 고상하고 심원한 학문에 대해서는 말하기 좋아하나 집안 거들 줄을 모르고 인사말 할 줄도 모른다. 먼저 《계몽》 이나 《태극도》 같은 책을 배우기는 하나, 자신의 몸 수양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하고 결국 빈 이름만 띠게 된다." 라고 하였다. 한 번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런 폐습을 없애자고 하였다. 또한 언론이 매우 활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잘 계발시켰으므로 듣는 사람들 치고 결심을 다지면서 공부를 철저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듯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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