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불교는 보편적인 법칙을 주창함과 동시에 진리의 체득을 통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와는 달리 보편 법칙의 객관화를 추구 하는 과학은 주관적인 체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과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득한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 점이 불교를 '앎의 종교'이자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있어 왔던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고는 단지 그 이름만 명명한 법칙의 발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초부터 있어왔던 우주의 진리가 연기의 법칙에 의해 존재함을 깨닫고 이를 체득하여 진리를 보는 동시에 진리의 궤범을 확인한 실천가인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부처님이 진리의 발견자인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됩니다. 진리의 발견은 존재의 문제를 '무엇'일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탐구하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체득이란 보는 시각을 '어떻게'라고 설정하고 접근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만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법구경』에 “비록 백년을 살아도 어지러이 날뛰면 하루를 살아 고요히 정진하는 것만 못하다.”라며 정진의 경지를 강조 했습니다.
 공자도 나이 일흔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하여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는 말로 체화의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를 불교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고락과 번뇌에 시달리지 않음에도 법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존재의 문제를 '무엇' 일까라고 보는 시각 에서 '어떻게'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설명하게 되면 나타납니다. '무엇'이라고 보는 방식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방식입니다. 부처님 당시 깨우쳤다고 주장하던 외도들의 방식도 그러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이라는 실체에 집착해서 오로지 욕심과 탐심을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물체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파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입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는 이러한 이치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에게 그러한 눈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라는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스스로 정화하고 여기에서 스미어 나온 자비로 온 누리를 덮어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바로 '어떻게'라고 접근하는 방식이며, 부처님의 보편적인 법칙을 주창함과 동시에 진리의 체득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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