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상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는 곧 우리의 참마음인 것이며, 여기에는 나와 남,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시간과 공간, 유와 무, 생과 멸 등의 모순이나 대립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순과 대립은 중생들이 진리에 무지하여 욕탐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난 허망한 망념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알아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는 욕탐의 방향만 바꾼다면 그대로 모든 모순과 대립이 사라진 열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욕탐을 없애거나 버리라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욕탐은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욕탐을 연기(緣起)의 기준으로 돌려 생각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말장난이라고 치부하는 이유는 부처님의 말씀을 두고 서로 생각의 차원이 다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우리의 현상계에서 주고받는 논리구조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모든 존재는 우리의 삶과 관계해서 우리에게 인식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설명을 하고자 할 때 원효대사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거론합니다.

 원효스님이 중국으로 공부하러 떠날 때의 일입니다. 스님은 의상스님과 당나라에 유학을 가기 위해 머나먼 길을 가다가 밤이 되자 굴을 찾아 그 속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굴은 무덤이었습니다. 밤중에 심한 갈증을 느끼고 물을 찾다가 손에 바가지가 잡혀서 무심코 그 바가지 물을 마셨습니다. 갈증이 심했던 터라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깨어나 어젯밤 마셨던 그 물이 생각이 나서 다시 마시려고 바가지를 찾았으나 바가지는 없고 그 곳에는 해골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구더기가 득실대는 냄새나는 썩은 물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어제 마셨던 물이 해골 속의 썩은 물이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역겨워지면서 구역질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원효스님은 깨달았습니다.

 해골이나 물은 변함이 없는데 나의 마음이 변하니 해골도 물도 변했다는 사실을 깨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이치를 깨닫고 내가 구해야 할 부처님 법은 나의 마음속에 있을 뿐 당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유학의 길을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설명을 할 때 단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마감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렸다라고 첨언을 하면서 끝을 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상계적인 논리구조의 방식으로 파악한 단견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가 단지 더럽고 깨끗한 것이 마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원효 스님이 깨달은 것이 단순히 더럽고 깨끗하다는 감정적인 판단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효스님은 모든 존재는 우리의 인식에 의해 인식된 것일 뿐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생각과 가르침의 방식입니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부처님의 논리구조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있는 것과 없는 것, 또는 좋고 나쁜 것을 따지는 그런 방법이 아닙니다. 일체유심조의 뜻을 왜곡시켜 단정 지은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으로 이야기 하면 결론은 거기까지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존재의 실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 우리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중생은 욕탐을 버리려고 하지만, 부처님은 욕심을 연기의 시각으로 바꾸어 보라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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