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넓은 숲에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곳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날마다 짐승들을 잡아먹고 먹다 남은 가죽과 뼈들을 그대로 버려두었다. 이내 숲은 더러운 짐승의 시체로 가득차고 사방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 나무의 신이 산신령을 찾아가 말했다. “여보게, 사자와 호랑이 때문에 우리 숲이 더러워지고 있네. 그러니 저놈들을 쫓아내야겠네.” 산신령이 말했다. “여보게, 우리는 저 호랑이와 사자 덕분에 살고 있네. 저들을 쫓아버리면 이 숲은 파괴되고 말 걸세. 저들이 없어지면 인간들이 와서 이 숲을 모두 베어버리고 밭을 일굴 것이란 말일세.” 그러나 나무의 신은 곧 사자와 호랑이를 쫓아버리고 말았다. 호랑이와 사자가 없어지자 숲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숲을 모두 베고 밭을 일구었다. 결국 나무의 신과 산신령도 모두 쫓겨나게 되었다.』

 『본생경』 272에 나오는 우화입니다. 이 세상에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연기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기의 이치에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중 하나도 나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와 세계,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실체가 없다면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아 우리 앞에 나타나 있지 않을 뿐입니다. 시절인연이 맞닿으면 언젠가는 인연 따라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만법은 무상(無常)하고, 상주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지만 인연 따라 항상 나타나고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참뜻이고 인연법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아’란 ‘내가 없다’라는 부정이 아니라 분별심을 배제한 무분별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외도들은 이 같은 참된 자아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멋대로 자아라는 것을 설정해 놓고는 상견과 단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두의 주장들의 잘못됨을 설파하고 명쾌한 타협의 방편으로 단상중도를 설명하셨습니다. 중생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몸 밖 외부에 있고, 그 세계 속에서 우리들은 자신과는 별개의 중생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중생들은 몸을 자아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몸과는 다른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허망한 단견과 상견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십이연기를 시작하는 ‘무명’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이연기법은 상견과 단견에 빠진 중생들이 어떻게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교리입니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단견과 상견을 배제하고 무명을 밝혀, 무아를 터득하여 중도를 찾아가는 이정표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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