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가톨릭의 교리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정화를 받기 위해 머물고 있는 장소인 '연옥'이 있습니다. 연옥이란 라틴어로 'Purgatorium'이며 깨끗하게 하다, 정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연옥이란 심판을 기다리는 정화의 장소를 말하며, 고린도전서 3장 15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 날 것인가? 아니면 죽으면 그만일까? 라는 궁금증은 우리 중생에게 있어서는 풀리지 않은 숙제 중 하나입니다.


 불가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서 영생한다는 것을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기에 대부분 존재론적인 불안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삿된 견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만약 존재론적 불안을 사견의 신앙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현재의 행복은 유보해야만 합니다.

 영생을 하기 위해서 사견은 우리에게 오늘의 희생을 강요하며 순교를 숭배 시 하고 헌금하고 순종하라고 요구합니다. 반면 사견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단견(斷見)'이 있습니다. 단견은 '죽으면 그만인데 되는대로 살자'라는 막가파식 생각을 말하는데, 이 또한 인생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이 대목에서 과연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당시 부처님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적취론(요소설)에 입각한 사상으로서 단견이라고 규정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난다는 생각조차 옳은 생각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상견(常見)이라며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상견과 단견을 모두 물리친 것을 단상중도(斷常中道)라고 합니다. 이 지경 쯤 되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우리의 생이 끝이라는 단견과 영혼은 죽지 않고 내세에 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상견은 모두 외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외도들은 어떻든 어떤 형태로든 ‘자아’라는 실체를 인정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해결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요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육신을 일시적이 아닌 우리의 자아라며 그 실체가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자아는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을 뿐,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태어날 당시 갓난아기 모습을 나라고 하는 실체, 즉 자아라고 한다면, 지금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갓난아기를 지금의 나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일시로부터 전제된 자아는 실제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시간적으로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단견인가 상견인가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 때 연기법은 그 무아의 도리를 일깨우는 진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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