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고려 고종 때의 고승인 진각스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결박하는 것도 결박을 푸는 것도 남이 하는 일이 아니다. 풀거나 얽어매는 것이 타인이 아니라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깨닫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되, 놓아버릴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고 놓아버릴 것 없는 그것마저도 다시 놓아버려야 한다. 그 경지에 이르면 위로는 우러러 잡을 것이 없고, 아래로는 자기 몸마저 없어져 청정한 광명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천길 벼랑에서 마음대로 붙잡고 기회를 따라 움직이되, 조금도 움직이는 모양이 보이지 않는 이라야 비로소 안락하고 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용은 『진각어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은 자유로운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스스로가 속박된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마음은 탐진치 삼독으로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답답함은 바로 스스로의 정체, 즉 내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답답함은 통상적으로 궁극적인 의문으로 이어지며,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구체화 됩니다. 난 누구인가? 도대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갈까?  왜 태어나 죽는 걸까? 이러한 의문에 매달리면서 점차로 그 의문은 가슴속에 자리하고 좀처럼 비켜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문이 온통 자리를 잡아, 이제는 그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산다는 의미조차 상실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경에 이른 사람은 깨닫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에 대한 순수한 발심인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속박된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고픈 순수한 것이므로 반드시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이 뭣꼬’라는 화두를 앞세워 부모로부터 몸을 받기 전의 ‘나’가 누구인가를 찾으라고 가르치는 것을 봅니다. 허상인 실체를 찾아보라고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무엇인가를 찾고자 마음 밖을 향해 치달리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조금의 불순물도 허용치 않습니다. 모든 깨달음은 순수한 마음, 청정심으로부터 비롯하고 또 그를 회복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가장 값진 보석은 내안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내 안에 엄청난 보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먼저 네 안에 간직하고 있는 황금을 보라는 것입니다.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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