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주지 법지

서양에는 존재의 개념으로 'ALL OR NOTHING' 두 가지로만 구분을 합니다. 'ALL'이란 전부를 뜻하는 말로서, 존재는 있지만 자기가 포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또 ‘NOTHING'이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유(有)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입니다. 이는 또한 자기 부정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ALL과 NOTHING 이외에 ‘공(空)’이라는 세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세계는 서양의 유와 무의 대립을 초월하여 유와 무를 하나로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묘해서 ‘모든 것은 변화 한다’를 드러내는 관점으로서, 변화가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이 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진실을 이해할 경우, 절대적이고 불변자인 신의 존재를 의심케 만듭니다. 그리고 신만이 가지고 있는 증명 불가능한 상황과 신의 독선을 야기 시키는 절대적인 믿음의 영역에서 논리적으로 접근이 가능한 합리적 추론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러한 시작으로 부처님은 연기라는 변화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유무의 세계를 이해하는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떠한 관계로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즉 관조(觀照)라는 분절적인 방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를 해체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것들은 관계된 듯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연기라는 관계성의 변화를 완성시켜 줍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관계란 서로 조건이 되어 주는 현상들의 상호작용으로서 이 현상들의 근본적인 무상성(無常性)을 강조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의 베다 사상과 여타의 비베다적 사상 모두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어떠한 실체라도 변화 자체를 존재의 원리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출요경』 권6 「방편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소를 먹이는 농부가 있었다. 그 이웃집에도 소 먹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농부보다 소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어느 날 농부는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수 백 마리의 소를 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무척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부터 그 농부는 자신의 소를 돌보지 않고,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이웃집 소만 바라보았다. 농부는 곧 이웃집 소들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이렇게 마음먹었다. “어차피 들에 뛰노는 것이니 내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날 이후 그는 자신의 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들에 나가 이웃집 소의 숫자를 세며 즐거워했다. “참 많기도 하지, 이제 나는 부자가 아닌가?” 농부가 매일 들에 나가 남의 집 소만 세고 있자 자신의 소는 하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맹수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혹은 들에서 길을 잃어 그 수가 날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 농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소를 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우화를 통해 우리는 관계성(緣起)과 실체의 의미(空)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관계성에 있어서 변화라는 의미는 실체라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따라야 합니다. 모든 실체가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소라는 의미도 나와의 조건결합에 의해서 생긴 허상일 뿐이며 이웃집 소 역시 조건결합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생은 소라는 실체에 집착하게 되면서 관계성마저 왜곡시켜 버립니다. 유무의 세계를 이해하는 자체가 목적이 되었고, 구성 요소들의 관계성은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불교의 논리는 대안적인 현실의식만이 강조되어 연기라는 관계성이 대두되다가, 이러한 인식이 확립된 이후에는 관계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공(空)이라는 관점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됩니다. 드디어 연기와 공의 조합으로 대승불교는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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