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주지 법지 합장

 대부분의 종교가 형이상학적 절대자들을 영적인 삶의 목적의 근원으로 설정한 탓에 우리는 무조건 믿고 의지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맹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요까지도 아무런 저항이 없이 수용합니다. 대표적 종교의 하나인 기독교에서는 신은 두려움의 신이며, 죽은 후에 나쁜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누가복음 12:4-5」에서는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어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겠다. 그는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나님이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3천년이 넘게 서양문화를 지배해 온 선형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학습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결과 무조건 믿고 의지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양적인 사고는 이와는 다른 궤를 보여줍니다. 부처님은 염라대왕이라는 신이 판결을 통해 악한 자를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뿌린 씨의 인과응보로서 지옥에 빠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지옥을 택한다는 것이지 악한 사람을 지옥으로 던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연기의 깨침을 설파합니다. 이처럼 불교는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적절성을 지키며 바르게 사는 삶을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깨달음에 대한 강조를 합니다. 깨달음이란 ‘나’안에 잠재되어 있는 ‘불성(佛性)’을 살려 내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깨닫기 위해서는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 된 발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로는 깨닫고 싶어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깨달음이 주는 효과입니다. 단지 그 효험이 탐이 나는 것입니다. 서구의 신앙이 추구하고 있는 선형적 인과관계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탐을 내는 효과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나면 부수적으로 갖추어 지는 것입니다. 연기의 적절성을 구가하게 된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효과만 취하고자 한다면 이는 바로 탐욕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얻는 깨달음은 단지 신기루입니다.

흔히 무엇 때문에 깨달으려 하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마음이 편해지려고요” 라고 대답들을 합니다. 물론 이런 대답도 잘못된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의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것처럼 ‘나(아트만)’와 ‘우주 혹은 근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법의 실상을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법실상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참된 삶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의도는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편해진 마음과 같은 부수적인 효과나 효험이 따라 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마음으로 깨달음을 위한 발심을 하는가에 따라 결과도 그 발심에 걸맞게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백유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몹시 배가 고팠다. 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저잣거리로 들어갔다. 마침 떡집이 눈에 띄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 떡 일곱 개를 주문했다. 주문한 떡이 나오자 그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섯 개 반을 먹자 벌써 배가 불렀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때리면서 후회했다. “내가 지금 배가 부른 것은 일곱 번째 떡의 반 조각을 먹었기 때문이다. 아깝구나! 진즉 알았다면 앞의 여섯 개는 먹지 않았을 텐데.”」 만족이란 항상 뒤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지막에 얻어지는 단 열매에만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만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섯 개의 떡을 아까워합니다. 하지만 만족의 단 열매는 여섯 개의 떡이 아니라 시장기를 느낀 나머지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연기라는 불교적 시각은 인간이 처한 곤경과 실현가능한 해탈에 관한 불교적 관념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기설 안에서는 모든 요인들, 즉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모든 것들은 불변하거나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나 본질이 없이 상호 인과적인 상호작용의 연결망 속에서 존속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괴로움은 이러한 요소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특히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오해로부터 발생한 탐진치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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