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경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룬 세존(世尊)은 나이란자나 강변의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다. 한번 앉은 채 칠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렸다. 칠일이 지난 다음 선정에서 깨어나 초저녁 무렵에 다음과 같은 차례로 연기(緣起)의 법을 관찰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의 진리에 대한 설명입니다. 연기란 인연 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인데, 모든 존재는 홀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한마디로 조건에 의한 발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계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가치적 의미의 관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은 어떤 창조자 또는 절대자가 만들어 놓음으로서 특정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모든 사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인(因)과 연(緣)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하여 비롯된 그 시점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특정 실체의 모든 가치는 변화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어떤 조건들이 만나서, 한 때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 조건이 바뀌게 되면 변하게 되는 가변성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변화의 철학을 부처님은 연기라고 규정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의 세계관인 연기법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 속에 여러 인간과 함께 다른 중생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일어나는 사건이 그물처럼 싸여 있는 회로에서 발생하는 상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가치와 힘은 어떤 절대자에서 아래로 작용한다는 가정과 함께,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는 공동의 생존에 적대적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부추겨져 왔습니다. 그러한 사고의 바탕위에 그 질서는 위로부터 부과되어야 한다는 선형적인 믿음을 강하게 요구해 왔습니다. 이로써 상호관계의 유지는 매우 곤란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서는 위로부터, 즉 마음이 생명이 없는 물질적 힘에 의해 그 의지를 행사함으로써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 자체의 자기 조직화하는 본성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러한 상호발생적인 패턴들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의 선택 방식을 통해 권리를 주장하고 다양한 생활방식 속에서 작용하는 조화로움을 표현하고 발휘하게 됩니다. 인연생기가 작동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 자신의 마음에서 연기한 각기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똑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을 지라도 사실 이 세상은 각기 중생의 마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같은 물이라고 할지라도 천상의 중생에겐 유리로 보이고, 인간에게는 물로 보이며, 물속에 사는 물고기 같은 중생들에겐 공기로 보입니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구분하는데 소리보다는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박쥐는 자신이 낸 소리가 반사되어 오는 것을 감지하고 사물을 분별합니다.


이처럼 중생의 마음에 따라 그들의 세계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중아함경(中阿含經)》에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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