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묘법연화사 주지 법지 

 불가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열반(涅槃)’입니다. 열반은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으로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서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상가라바'라는 한 바라문교의 수행승이 찾아와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 저희 바라문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양을 올림으로써 자기 또는 타인을 위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비는 길을 닦고 있습니다만, 부처님과 제자들은 오로지 자기를 다루고 자기의 고뇌만 없애는데 전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한사람만의 행복을 위해 수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만일 자기를 다루고 이를 실천해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은 사람이 그대들에게 이 길을 함께 가고 실천해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얻고자 권유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해탈을 얻은 사람이 수백 수천에 이른다면, 그대는 그 수행자가 자기 한사람만의 행복을 위한 길을 걷는다고 하겠는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내용은 중아함 상가라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수행의 길을 걷고, 또한 이를 실천함으로서 번뇌를 없애고 해탈을 증득하는 길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깨달음의 세계라고 하면 대부분 거창하고 신비하고 대단한 그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깨달음은 지극히 단순하고 싱거운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오로지 ‘나’와 ‘법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자신이 무엇이며 얼마나 존귀한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가에서는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은 바다 밑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물위로 올라와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나무판자를 만나 그 판자에 뚫린 구멍으로 올라앉을 기회만큼이나 희박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처럼 존귀한 것이 자신입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원죄를 받아 태어난 불쌍한 죄인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존귀한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 그래서 어떻게 나와 법계가 일체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주의 해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출세와도 사실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존재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런 깨달음이 전해주는 선물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큽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시선으로 깨달음을 빙자해서 더 큰 아파트 평수를 위하여 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어찌 이런 세속적인 가치와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사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이나 출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행여 잘못알고 마치 로또 복권처럼 여겼다면 즉시 그만 두어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에 대한 욕심과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묵히 그저 진리를 알고픈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이 진리의 탐구로 이끌린 사람들이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아무나 이런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날의 선업으로 받게 된 공덕으로 불법이나 선지식을 만나서 얻게 되는 크나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축복 받은 사람들은 태어남의 존귀함을 두고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고픈 것에 모든 삶을 헌신합니다. 즉 존재의 이유를 알기위해 삶의 모든 것을 오직 이 공부를 위해 바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인 것입니다.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주지 법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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