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서방의 종교와는 달리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여야만 바른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마치 무지개와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게 됩니다. 잡으려 하면 잡힐듯 하지만 잡으려 한만큼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충을 부처님이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친히 깨달으신 법의 규모는 이 숲을 가득 덮고 있는 나뭇잎들만큼이나 무량한데, 우리에게 베푸신 법은 그 중 나뭇잎 하나에 불과하다고 설명한 것에서 깨달음이란 쉬운 일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나뭇잎 하나에 불과한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깨달음을 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밝혔으니 깨달음이란 그리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님을 또한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이란 우리 삶 속에서 늘상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수행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명제는 우리의 목적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동사인 깨닫다의 명사형으로, 사전적인 의미는 "생각과 궁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접근으로 깨달음(悟, 覺)이란 "단순히 감각 등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심려와 숙고를 통해 알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견성(見性)이라고 표현합니다. 견성이란 돈견진여본성(頓見眞如本性)을 줄인 말입니다. 즉 견성은 진여본성을 본다는 뜻이므로, 진여본성이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교의 시작과 더불어 지금까지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가 됩니다.


 실제로 깨달음은 존재의 궁극적인 실상을 알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비롯되지만, 대개는 어떤 알 수 없는 내면의 부름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부름은 어느 정도의 의식이 성숙된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불가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야 깨달음을 향한 수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인연과의 만남을 통해 의식의 성숙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깨달음의 여정으로 우리의 삶 속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원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깨달음이 일어날 만한 궁극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문이 결국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 서원(誓願)이  바른 방법과 접목되고, 강한 의지로 온 마음을 모으게 되면 제대로의 수행이 이루어지며 그의 결과인 깨달음이 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수행의 정도는 궁극에 대한 알고 싶은 크기에 따라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절집을 들락거린 빈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큰스님 곁에서 부처님께 몇 배를 올렸는가도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최선을 다해 큰 깨달음을 원한다면, 한마음으로 지금의 나를 되짚어 보십시오.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서원(誓願)이 스스로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일이며 종교의 목적인 동시에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의 발현입니다.


 의상대사의 화엄경 법성게에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란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처음 발심한 원인(因)속에 깨달음의 결과(果)가 함장되어 있으므로 초발심이 곧 깨달음인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단박에 깨칠 수 있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깨닫고 싶으면 순수한 발심으로부터 시작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견성의 시작이고 깨달음의 수행입니다.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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