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 거주 불상 조각가 한청운씨를 만나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2자(尺)짜리 불상 하나 만드는 게 평생 꿈이라면 꿈이지요"

이런 것이 장인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욕심일까?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 그것은 어느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분신이요 긴 세월 질기게 버티며 자신의 세계를 다듬어온 작가 나름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불상 조각가 한청운(47)씨. 그는 오늘도 경주시 건천에 있는 작은 작업장에서 불상을 만들고 금칠을 입히는 작업에 땀을 쏟고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에 변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홍천. 여느 시골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한청운은 학교를 졸업하고 옷가지 몇 점만 챙겨 서울로 올라온다.

"매일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는 거에요. 2년간 똑같은 꿈을 꾸었어요. 왜 이런가 싶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문득 꿈 속에서 만나는 부처님을 내 손으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 불상 공방에 들어가게 되었구요"

그의 불교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때가 1985년. 그는 당시 성북구 정릉에서 불상조각으로 명성을 날리던 심상무 씨의 문하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사포로 불상 표면을 마무리하는 단순작업만 4년을 하게 된다.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불상만 닦아댔어요. 그런데 사포질 4년을 하고 나니까 조금 '조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조각'이 보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묻자 한청운 씨는 불상의 주름이나 가사 모양이 조금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조각 일은 맡겨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사포질만 해야 했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조각칼을 잡는 소위 '가사잡는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 일을 하고 한참 뒤 부처님 상호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호 중 눈, 코, 입술 부분을 수정하는 일을 맡았다.그러나 한청운 씨는 그 때도 흉내만 냈지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7년을 보낸 한청운은 또 다른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진영 씨를 찾아갔다. 이 씨는 당시장인들 사이에선 인간문화재로 불리며 그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불상과 함께 개금하는 기술을 배운다. 이 부분에서 그는 개금이 무척 어렵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금칠하는 것으로만 보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개금을 하기 전 조각이 잘못된 부분을 먼저 바로 잡아줘야 합니다. 처음 나온 작품의 40% 정도는 온전치 못한 상태로 나옵니다. 그것을 일일이 손을 봐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요"

대전에서 4년을 보낸 한청운 씨는 이번에는 개금 전문가를 찾아 나선다. 그가 찾은 사람은 개금에서는 국내 1인자로 평가받고 있던 경기도 청평의 김두호 씨였다. 한 씨는 김두호 씨 밑에서 배우며 불상 조각과 개금에 눈을 떳다고 말한다. "아마 그곳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아주 까다롭게 가르치셨습니다. 어설프게 했다가는 아주 혼쭐이 나곤 했으니까요"

혹독하게 배운 만큼 그의 인생에 큰 족적으로 남는 일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큰절 불상 개금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조계사 삼존불을 비롯해 봉은사, 쌍계사 불상 개금도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북한 신계사 개금불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큰 보람과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한 씨가 개금에서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계기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무광(無光)개금을 개발했다는 것. 이 기술은 금박을 붙이는 방법이나 온도, 습도 등을 맞추는 과정에 그 노하우가 있다고 한다.

다만 목불(木佛)에서는 다소의 어려움이 있지만 다른 어떤 불상에도 광택이 없는 개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광개금은 덧붙임 없이 단 한번에 금박 붙여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수명이 거의 영구적이라는 것도 무광개금의 장점이다.

10여 년을 김두호 씨 밑에서 기술을 익힌 한청운 씨는 2007년 지금의 자리에서 일광불상조성원(054-751-8506)을 연다. 경주 산내에 있는 사찰에 일하러 왔다가 우연한 인연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그러나 처음 시작은 만만치가 않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정착에 따른 여건 또한 녹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실력과 성실함으로 이를 극복해냈다. 부처님오신날과 설, 추석이 유일한 휴일일 뿐 쉼없이 공방문을 열었다. 소위 '쟁이'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말 없이 도운 부인 김홍주 씨의 내조도 큰 버팀목이 됐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이 일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어렵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고 했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 일은 돈을 쫒으면 안된다"며 "그냥 부처님이 좋아서..."라고 했다. 가난한 스님을 위해 불상을 보시할 수 있는 것도 자기만의 재산이라며 수줍은 웃음을 보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상을 만드는 공방은 겨우 10곳에 불과하다. 험한 기술 습득과정을 거쳐 공방을 열어도 외국에서 들여오는 수입 불상들로 재정난에 허덕인다. 이러한 현실은 한청운 씨에게도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그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오랜 전통의 불교문화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불행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막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어떤 시인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과거의 사진첩 속으로 접혀지는 세월을 바라보며 그대들은 자신에게 어떤 찬사와 질타를 보냅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한청운 씨에게 물었다. "당신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당신에게 보낼 수 있는 찬사와 질타는 무엇입니까?" 한청운 씨는 한동안 그저 말없이 앞만 바라봤다.

"좋아할 것도 나무랄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어릴 적 꿈에서 보고 소망했던 그 부처님을 제 손으로 모실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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