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남명문학상 소설최우수 수상작품

하정구
하정구

56년 동안 부부로 살아가면서 안락한 생활보다는 고통과 인고의 나날이었으니, 소리 없는 눈물만 흘렀다. 남명이야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 하지만, 말없이 남명 이상으로 모든 고통과 근심을 짊어졌어야 했던 것이다. 남명이 가난한 살림 가운데서도 그나마 학문과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네가 가서 상주 노릇을 하여야겠구나.”
남명은 큰아들 차석을 김해로 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계 이황의 부고를 들었다. 도산은 덕산과 5백여 리 떨어져 있으니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당도한 부고였다.
“아, 나도……이 세상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남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절망하였다. 같은 해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의식하면서 혹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서로 의지가 되어온 사람이 아니었던가.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어떤 친구보다 깊은 정을 나누었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격려하였다. 반면 잘못된 판단과 언행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해 느슨해지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 누가 나를 살펴 일깨워준단 말인가?”
<민암부> 이후에도 두어 차례 더 상소를 올렸지만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였다. 선조 임금이 다시 불렀을 때 1,600자에 달하는 긴 상소를 올려 서리(胥吏)들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라 상황이 갈수록 더 급박해지고 있다고 하여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임금 바로 아래 도적이 가득 차 있고 나라는 텅텅 빈 껍데기만 끌어안고 있는 꼴이옵니다”라고까지 했지만 선조의 반응은 태평이었다.
이황이 죽은 해 큰 흉년이 들어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백성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남명은 다시 임금의 실정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결딴났는데도 여러 신하와 벼슬아치들은 서서 구경만 하고 손을 쓰지 못합니다. ……군의(君義, 임금이 옳아야 한다)라는 두 글자를 새로 바치오니 전하께서 먼저 몸을 닦고 나라를 바로 잡으소서” 남명은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도 임금이 현실정치에 반영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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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은 출입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산천재에 앉아 천왕봉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횟수가 크게 늘었다. 눈이 침침해지는 듯 서책을 보는 시간도 줄었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혹은 시름에 겨운 듯 표정이 어두웠다. 간간이 오는 친구나 제자들의 편지를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았고 받은 즉시 답장을 보내었다. 마치 끊어지고 막힌 길을 이을 수 있는 곳이 밖으로 나 있다는 듯 자꾸만 바깥으로 눈길을 주었다.

 

 


-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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