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남명문학상 소설최우수 수상작품

하정구
하정구

“겉으로야 그렇지만 내심 바라는 바가 아닌가? 그런 자리는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도 없고, 추천할 수도 없는…….”
남명은 더 이상 들을 게 없다고 판단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 길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으니, 한양에 도착한 지 꼭 7일 만이었다. 자괴감만 잔뜩 안고 돌아온 한양길이었다.
이번 일로 남명에 대한 평이 분분하였다. 남명은 임금께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조야의 의론은 다르게 돌아갔다. 함께 불려왔던 갈천(葛川) 임훈(林薰)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갔는데 남명은 정식으로 사직을 하지도 않고 홀연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고항(高亢)의 선비로서 세상일에 굽히지 않으려는 태도를 높이 사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뒤에서 비꼬는 자들 또한 없지 않았다. 이준경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간 것은 남명의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준경이 남명을 업신여겼던 행위를 두고도 오히려 “남명의 도량이 좁다”고들 입방아를 찧었다. 다들 글줄이나 읽고 쓸 만한 시문께나 읊다가 엇나간 파락호 대하듯 손가락질하고 능멸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6월, 개혁을 서두르던 명종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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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외척 중심의 정치가 끝나고 일시적 공백이 생기자 사림들이 대거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면서 양상이 점점 더 대결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 나름의 안정과 평화로 이어지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현실정치란 원래 권력투쟁적인 모습을 띠지 않을 수 없지만 구체적인 전망 없이는 한낱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의 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삶은 더욱 헤어날 수 없는 질곡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또한 유민들의 분노가 임꺽정 수준에서 끝나지도 않을 것이고, 왜구들의 노략질도 경상도나 전라도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사태는 솔기 끝을 잡아당기면 줄레줄레 풀려버리는 옷감처럼 연쇄적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남명은 제자들 양성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 중에서 병법에 더욱 시간을 많이 할애해 전략적인 면에서나 실제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련을 하도록 했다. 특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여러 가지 책제(策題)를 통해 제자들을 시험하고 준비하게 했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왜구를 미리 막아내거나 꺾을 계책은 없겠는가?”
“멋대로 재난을 일으키고 거짓으로 친교를 내세우며 제포(薺浦, 창원시 웅천)를 돌려 달라거나 재물을 요구하는데 퇴치방법으로 무엇이 있는가?”
“왜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규모 도발을 해올 경우 병사와 무기는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좋은가?”

-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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