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남명문학상 수필 최우수상

이은정2004년 순수문학 시 등단2010년 화백문학 수필등단 기온문학 우수상 수상김해문인협회 우수 작품집상 수상2019년 대한민국 장애인 문학상 우수상 수상저서: 수필집/ 하얀 고무신 신은 여자
이은정2004년 순수문학 시 등단2010년 화백문학 수필등단 기온문학 우수상 수상김해문인협회 우수 작품집상 수상2019년 대한민국 장애인 문학상 우수상 수상저서: 수필집/ 하얀 고무신 신은 여자

텃밭 한 구석에 부추를 심었다. 부추는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잘 자라고 밑 부분까지 싹둑 잘라내어도 며칠 후면 잎이 새파랗게 돋아나는 생명력이 강한 채소이다. 우리나라 어디서든 재배가 가능하고 키우기도 쉬워서 텃밭이 있는 곳은 물론이고 아파트 옥상 같은 곳에서도 많이 키우고 있는 것 같다. 부추는 독특한 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요리의 보조역할로 요긴하게 쓰이고 고혈압을 예방하고 소화 기능과 간에도 좋은 여러 가지 약성도 갖고 있다고 한다, 봄에 처음 수확한 부추는 인삼 못지않은 약효가 있어서 아껴두었다가 맏사위를 준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이다. 8월이나 9월경이면 가늘고 긴 꽃대를 밀어 올려서 산형 꽃차례를 이룬 하얀 꽃을 피우는데 자세히 보면 꽃 모양이 특이하고 예쁘다. 한 움큼 꺾어다가 큰 유리컵에 꽂으면 훌륭한 작품이 된다.
나에게는 부추라는 말보다는 어릴 적부터 귀에 익은 정구지 라는 경상도 말이 더 익숙하다 정구지 김치, 정구지 꽃이라고 발음해보면 고향의 맛,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난다.
 오늘은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잘 자란 부추를 반 단 정도 베어서 솜씨를 부려보았다. 옛날에 어머니가 하시던 데로 멸치젓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양념을 만들고 풋내가 안 나게 조심조심 무쳤다. 손가락으로 집어서 맛을 보다가 알싸한 부추 향기에서 풍겨 나오는 옛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거름이 귀하던 시절, 어머니는 오지 물동이에 삭힌 오줌을 담아 머리에 이고 언덕 위의 밭을 일구어내셨다. 잘 자란 정구지를 베어서 오일장에 내다 팔면 동생들 군것질 밑천이요, 김치로 만들면 가난한 자취생인 나의 밑반찬이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서 자취생활을 했는데, 토요일이면 반찬이랑 용돈을 받기 위해 열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고향 기차역에 내려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면 십리 길을 걸어갔지만 멀리 우리 집으로 들어서는 길모퉁이가 보이면 힘든 줄도 모르고 달려갔다.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편안하게 쉬면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오후엔 다시 자취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다.
 플라스틱 제품이 대중화되기 전이라 어머니는 정성들여 만든 정구지 김치를 작은 옹기 항아리에 담아서 보따리에 싸 주셨는데, 왼쪽 손엔 책가방 오른손엔 보따리를 들고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동해남부선 오후 네 시 부산행 열차는 그날도 만원이라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나는 출입구 쪽 구석진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열차의 흔들림에 옹기단지가 깨질까봐 보따리를 꼭 안고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 틈 사이로 우리 학교 부근에 있는 남학교 D고교 모자가 언뜻 보였다.
조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 얼굴이 나를 보는 건지 김치단지 보따리를 보는 건지 자꾸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보물단지처럼 보따리를 안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견뎌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서 자취집으로 걸어가다가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뒤돌아보니 아까 본 D고교 모자가 내 뒤를 따라 오는 게 아닌가. 슬금슬금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걷다가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이거 좀 들어 주이소.”
하고 단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보따리를 건네받은 그는 엮인 청어처럼 말없이 따라오고 나는 쌩하니 앞서서 빠르게 걸었다. 골목길에 접어들고 자취집이 가까워오니 조바심이 났다. 가난한 내 거처가 공개된다는 건 자존심 문제라 순간적으로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때다 싶을 때 홱 뒤돌아서서 잽싸게 단지를 뺏어 들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단거리 육상 선수였으니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씩씩거리며 집 앞에 와서 뒤돌아보니 그 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따돌리기에 성공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하하! 하고 웃음이 나왔다.
 세월이 제법 흐른 후에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를 우연히 만났는데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때 열차 안에서 친구들하고 내기하면서 저 여학생을 꼬일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가 실패다. 실패! 하면서 가슴을 치고 돌아갔단다. 김치단지 들고 따라가던 이야기는 두고두고 놀림거리였다는 데 요새 말로 쪽팔렸다고 한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달려가던 내 모습을 흉내 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후 소식 없는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 이제 그 사람도 나처럼 황혼의 나이가 되었겠지만, 추억은 늙지 않고 언제나 새파란 청춘이다. 부추김치 매콤한 향기 속으로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보이고 장난기 어린 D고교 모자가 어른거린다. 그 추억 속으로 단발머리의 한 소녀가 걸어 나온다. 세월의 흔적을 지우며 부추 꽃처럼 하얗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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