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남명문학상 수필 우수상 수상작품

이경훈
이경훈

햇살이 제법 눈부시다. 미간을 좁히며 무연한 눈초리로 올려다 본 건너편 아파트 꼭대기의 하늘이 진한 파랑의 물감을 풀어놓은 양동이속 같다. 마음도 덩달아 파랗게 번져가며 너그러워진다. 습관처럼 다시 올려다 본 하늘 낮은 쪽에는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
  하천변에는 헝클어진 가지사이로 핀 선명한 노란 개나리가,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조화처럼 팽팽하게 뭉친 연분홍의 벚꽃이, 벚꽃이 아니라는 항변의 표시로 하얗게 질린 앵두꽂이 각 자의 구역을 정한 듯 간격을 두고 만개해 있다. 은은한 속삭임이 사부작사부작 날린다.
  최상의 생기를 뿜어내고 있는 듯 활력이 느껴지는 나무들에게 코끝을 킁킁 대어보고 싶다. 봄이 오는 냄새가 여기 저기 알 수 없는 방향에서 밀려든다. 감미롭게 날리고 있는 ABBA그룹의‘andante andante’를 듣는 이어폰 사이로, 불쑥 들어온 바람이 실크처럼 감미로운 촉감으로 목덜미를 덥석 만지고 달아난다.
  겨우내 입으면서 몸에 편해 습관처럼 걸치고 나온 검은색의 외투를 내려다보니 돌연 어깨를 짓누르는 듯 무거움이 새삼스럽다. 추위를 감당해주었던 기억은 온데 간 데 없고 게다가 그 칙칙함이란, 참아내기가 힘들어 벗어던지고 싶다. 봄엔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워진다.
  차례를 정해놓은 것처럼 소리조차 없는 호명으로 슬며시 등장해 흐드러져있는 봄꽃들을 보며 환호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내게 봄은 그다지 달가운 계절이 아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이 즈음에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낯선 상황들과의 서툰 교류가 내키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는 새로움과의 대면은 늘 가슴속에서 설겅거리는 소리를 냈고 때론 곤혹스럽기까지 했다.
  춥다고 표현하기는 다소 미흡하지만 차가운 쪽에 가까운 서늘한 하루를 견디곤 하던 봄의 정체는 마음을 헛헛하게 했다. 창밖의 햇살은 환하게 밝은데 정작 다가오는 대기는 명칭부터 새침한 꽃샘추위라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기온에 맞지 않게 옷깃을 파고드는 이 어설픈 추위는 그야말로 비겁한 회색분자 같아서 미덥지 않았다.
  게다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다고 새날을 설계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선뜻 동조하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심신을 화사하게 단장해 봐도 선뜻 내디뎌지지 않던 주저함 같은 건 무엇에서 기인했을까. 결국 양면성을 가진 현명한 계절을 좀 더 기꺼운 마음으로 환영하는 눈치 빠른 영민함이 부족했던 것 일게다.
  계절에까지 확고한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편협한 아집은 직장생활을 하는 긴 세월 내내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이 후회 섞인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순간도 가끔 있지만 이제는 모두 두루뭉술한 형체로 남은 기억일 뿐이다.
  느닷없이 지나는 바람 따라 애써 핀 꽃 이파리들이 한꺼번에 와그르르 수선을 떤다. 되돌릴 수 없는 지난 시간의 흐릿함을 지금 이 순간의 오지랖 넓은 바람에 섞어 후후 날려 보낸다. 따스함에 취한 채 나무와 풀과 구름과 냇물을 바라보며 걷는 일은 시간을 넘나들게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간 모든 것은 각색이 가능하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여러 가능성을 가진 최상의 순간이 되어준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법한 세월을 살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생의 절반동안을 자연현상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의 과제수행만이 최선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탓이다.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 바람이 불어온다. 한손으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옷깃을 꼭 여미며 부여잡는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건 진정한 봄이 아니라고, 이맘때는 으레 그랬지 않느냐며 고개를 끄덕인다. 봄은 찬연한 햇살이고 훼방꾼인 바람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삶을 둘러싼 내 무지에 대해, 조금 만회하는 기분이다.
  담색의 마른 풀들 사이에 보라색으로 화려하게 피어있는 여리고 작은 꽃 무더기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눈에 띄었던 건 근처 풀밭 사이의 꽃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희소가치에 힘입어 더 돋보였겠지만 참으로 싱그러웠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검색하니‘봄까치꽃’이었다. 야생화에는 도통 문외한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손에 닿기만 해도 툭 떨어져버린다는 이 꽃의 꽃말은‘기쁜 소식’이었다. 저녁이 되면 낮에 피었던 꽃은 떨어지고 다음날 새로운 것을 피워 올린다고 한다. 추운 겨울 내내 소생을 꿈꾸며 예비하다 결국 피워 낸, 봄에 걸맞은 꽃이다. 결별과 신생의 주기를 너무나 잘 알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순리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봄은 어수선한 세상사에 미동도 없이 어느 순간 살며시 다가와 분주하게 진을 치고 앉아 두리번거리며 퇴장할 순간을 엿보고 있다. 평행선을 달리듯 정돈된 질서 속의 자연은 시간에 따라 온도와 바람과 꽃의 이야기들을 늘비하게 펼쳐놓는다. 그러다 때가 되면 여러 번 리허설을 한 것처럼 작은 혼란조차 없이 심상하게 툭 툭, 등장하는 것이다.
 문득 남명 조식선생님의 시조 한 수가 생각난다.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한 조선시대의 학자답게, 자연의 섭리를 시속에 함축해서 표현했다. 
   
    路草無名死(노초무명사) : 길가 풀은 이름 없이 죽어가고
    山雲恣意生(산운자의생) : 산의 구름은 제멋대로 일어난다.
    江流無限恨(강류무한한) : 강은 무한의 한을 흘려보내며
    不與石頭爭(불여석두쟁) : 돌과는 서로 다투지를 않는구나

 각자도생하면서도 결국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만물의 척도는 제각기 다르지만, 그 속에서 한결같음이 유지된다는 정도(正導)를 이야기한다.
  아하! 풀과 구름과 강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에 대하여 평생 잘 모르고 살 뻔했다. 모르고 사는 게 어찌 이것뿐이랴. 살아온 시간과 앎의 분량이 비례해야 하는 게 반드시 정답은 아닐 것이다. 나이 값 같은 게 구체적인 항목으로 나뉘어 세세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 내가 사는 지상의 규범이 다행스럽다.
   길가의 풀이 무성한 하천변은 바야흐로 팽팽한 봄날이다. 간간히 머리카락 휘날리다가 어느 순간 굿거리장단으로 아름드리 고목의 억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바람연주가 한창이다. 흔들리면서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는 꽃들의 춤사위가 흐무러지는 풍경 사이를 그들과 하나인 듯 나는 천천히, 그저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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