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일|법철학 박사
강재일|법철학 박사

최근 들어 부쩍 수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작문법이 자유롭고 글의 구성 역시 정서적이라 그런 것 같다. 하기야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아무래도‘이성적’인 것보다는 ‘감성적’인 쪽이 훨씬 유리하리라.
수필의 특성을 교과서에는 [형식, 제재題材, 필자의 독백이 자유롭게 배인 개성적인 글]이라 요약 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는 ‘단순한 사유思惟를 붓 가는대로 물 흐르듯 풀어 쓴 글’이라고 했다. 이 말은 어딘가 석연찮은 느낌이 든다. 아무리 수필이 필자의 자유로운 독백이기로서니 아무런 고민도 없이 붓 가는대로 물 흐르듯 씌어 진 산문을 제대로 된 수필이라 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수필에는 수필 나름대로의 예술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사유가 필수적이다. 정말로 자신의 논리적 생각을 물 흐르듯 붓 가는대로 풀어 낼 경지에 도달한 탁월한 ‘글 꾼’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일찌거니 노벨 문학상 수상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원래 수필이란 말은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기인되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에세이(essay)와 주관적이며 정서적 신변잡기인 미스셀러니(miscellany)를 통칭하여. 물론 그 이전에도 수필이 없진 않았었다. 다만 그 이름이 달랐을 따름이다. 실제적 원조元祖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플라톤의 [대화편]으로. 그리고 그 이후 [몽테뉴]에서 꽃을 피워 영국의 베이컨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초기의 한문수필을 필두로 훈민정음이 창제 되면서 국문수필로 거듭나 근대수필로 이어졌다. 그 형태도 다양하다.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이 주된 글을 ‘문文’이라 하였고, 사실을 적은 글은 ‘기記’라고 하였으며, 책의 앞과 끝에도 글을 붙여 각각 ‘서序’와 ‘발跋’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편지글 등은 ‘서書’로 통칭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문학임에도 항간에는 야릇한 실랑이가 있다. 수필의 특성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형식이 자유롭다’느니, ‘소재의 제한이 없다’느니,
‘누구나 쓸 수 있는 비전문적 글’이라느니, ‘내용 역시 보잘것없는 짧은 넋두리에 불과한 글’이라는 등 문학의 범주에 넣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주장으로 모리 질을 해 댄다.
여기에는 수필가들의 책임이 크다. 그들이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자신들의 작품을 맹탕의 토막글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좋은 수필’이란 작가의 예지적叡智的 인식작용까지는 아닐지라도 상식선에서의 관상觀想은 어느 정도 배어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하는 ‘좋은 글’. 그 좋은 글의 개념은 한결같다. 독자에게 감동이나 교훈을 줌은 물론, 삶의 가치까지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아마추어의 글이라 할지라도 얼개가 탄탄하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선명하다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요, 아무리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의 글일지라도 횡설 수설의 반복이라면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계기로 수필가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쓴 글 모두를 수필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소위 등단과 수필은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란 얘기다. 수필작가가 내놓은 작품 중에도 수필의 태態만 본 딴 허접한 글들이 허다하니 말이다.
보통의 작문과 수필을 쓰는 기술은 엄연히 다르다. 그것이 수필가로 하여금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수필가의 ‘몫’이다. 여느 문학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수필에는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쌍두마차의 예술성이 두드러져야 한다. 어휘 선택부터가 그렇다. 문체의 시가 적 운율詩歌 的 韻律까지 고려한 도탑고 우미優美한 궁극적인 기술을 전제로 해야 한다.
문학의 예술성을 두고 우리는 ‘언어를 매체로 한 미적 창조행위’라 일컫는다. 이 말은 이미지의 형상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사물의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 도구로서 대체시킬 수 있는 문구文句를 자유자재로 구성할 수 있는 풍부한 어휘력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이 밑절미다. 뿐만 아니라, 수필도 지나치게 담담하고 구수하게만 씌어 지면 뭔가 밍밍해져 버린다.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다. 수필 작가가 구상해 낼만한 문장이라면 이미 아포리아(aporia)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하여 모든 것을 철학적으로 고민하라는 건 아니다. 좀 더 커다란 시각으로 사유를 확장시키다 보면 사물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가끔 국어사전에만 매달리는 글 꾼들을 본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왜 굳이 사전辭典에만 목을 맬까.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작법이라면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심어 나가는 독창성이 더 좋을 때도 있을 텐데. 나는 문체를 구성하는 어휘에 있어 순수한 한글만을 고집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글을 귀하게 여겨야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테두리에서의 표현 영역을 함축 또는 확장하거나 운율韻律적으로 적확的確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마땅한 어휘가 있다면 어떤 외국어인들 배척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누군가가 수필을 일러 하늘빛 청자靑瓷를 닮았다고 했다. 순수를 말하고자 함이리라. 그러나 수더분한 분청사기나 질박한 옹기의 멋도 나름대로 있지 않은가. 오히려 청자처럼 지나치게 매끄럽기만 하다면 그 맛이 덜할 것이다. 그리고 수필은 약간의 연륜年輪이 쌓인, 즉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에 이르러야 제격이라고 한다. 지당한 말씀이다. 인간이 지닌 나름대로의 재지才智야 천차만별이겠지만 아프리오리(a priori)적 감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수필가에겐 선천적이고 생득적生得的인 논리적 개념보다 오히려 삶 속에서 체득體得된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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