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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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예순 번째

작가 권 근은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로 공민왕 1년~태종 9년(1352~1409)의 인물로 호는 양촌이다. 1368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지신사 등을 거치고 첨서 밀직사사를 지냈다. 유배 생활 중에 조선 개국을 맞이하였다.
성리학자로 이 색을 스승으로 모셨고 정몽주, 김구용, 박상충, 이승인, 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류하며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조선)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데 크게 공헌 하였다.
고려 말 벼슬길에 나아가 나라의 패망을 겪고 조선조 개국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후 승승장구한 그가 김해부를 찾아 천추(千秋)의 가야왕조를 술회하였음은 무슨 뜻일까? 그가 이 시를 쓴 시기가 패망 전의 고려 때였는지, 조선 개국 이후인지 궁금해지는데 작가는 고려말 1389년에 유배를 당했으며 몇 년 후 풀려나 충주에 우거하던 중 조선 태조 2년(1393)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성리학자로서 문신으로 경학과 문학에까지 이름을 남겼다. 이 시를 볼 때 김해 유배생활중 이었던 1389년에서 1392년대에 김해에서 지은 것으로 느껴본다.

무제(無題, 가락고도에서 부른 노래) - 이 행李芳

行到盆城又一春 행도분성우일춘
家家隋竹淨無塵 가가수축정무진
題詩爲問招仙客 제시위문초선객
羽扇輪巾幾個人 우선윤건기개인

분성에서 또 한 번 봄을 맞는데
집집마다 대나무 티 없이 깨끗하다.
신선을 찾는 나그네 시로서 묻노니
우선륜건(羽扇輪巾)의 도사 같은 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예순 한 번째

작가는 성종 9년에 태어나 중종 29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호는 용재(容齋)였다. 1495년(연산군1)에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한 후 관직을 시작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홍문관 응교때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복위를 반대하여 충주로 유배 되었다가 1506년 거제도로 옮겨갔다.
이 해 9월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홍문관 교리에 다시 올랐다.
1517년에 대사헌, 1524년 이조판서, 1527년 우의정, 홍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신증 동국여지승람』 편찬 책임을 맡아 좌의정이 되었다. 김안로 일파에게 밀려 평안도 유배 중 1532년 죽었다.
 시의 후반부에서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심사가 읽혀지는데, 당파싸움에 대한 염증인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무제(無題, 가락고도에서 부른 노래) - 류득공柳得恭

訪古伽倻咽竹枝 방고가야인죽지
婆婆塔影虎溪湄 파사탑영호계미
回看落日沈西海 회간낙일침서해
正似紅旗入浦時 정사홍기입포시

옛 가야를 찾아드니 대나무 가지가 울고
파사석탑은 호계천 물가를 그늘 지운다.
돌아보니 지는 달은 서해에 잠기고
바로 홍기(紅旗)가 포구에 들어올 때와 같구나.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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