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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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가락동사무소 서남쪽 작은 구릉은 대나무가 많아 죽도(竹島)라 했다. 죽도를 안고 흐르는 서낙동강에는 전함의 기지로 수군(水軍)의 주사화약고(舟師火藥庫), 해창(海倉), 대변청(待變廳) 등이 있었다.
대변청은 해창의 남쪽에 있었으며 인조(仁祖) 24년(1646) 부사 이상경(李尙敬)이 건립하여 전함과 군기(軍器)를 설치했고 효종(孝宗) 즉위년(1649)에는 부사 박경지(朴敬社)가 수군 전용 창고인 해창(海倉)을 건립하고 대변청에 전선(戰船) 한 척과 군기(軍器)를 갖추었다. 이곳에는 황자호(黃字號) 한 척, 병선(兵船) 한 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있었다.
주사화약고는 영조(英祖) 4년(1728) 실화(失火)로 군기와 화약이 모두 불타 부사 홍덕망(洪德望)이 중건하였다.
죽도항에 대규모 해군 기지가 들어선 것은 뒷산 정상부에 자리잡은 죽도왜성(竹島倭城)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죽도 일대는 낙동강과 남해바다가 만나면서 그림 같은 풍광에 어족자원이 풍부한 평화로운 어촌이었다.
그러나 우거진 갈대숲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물길을 헤치며 도둑질을 일삼았던 왜구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김해를 초토화 시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김해성 함락 후 전략요충지인 죽도에 성을 쌓고 6년여 동안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도공(陶工)과 대장장이(冶匠)를 비롯한 장인(匠人)의 납치는 물론 부녀자까지 납치해 갔다. 돌이켜보면 뼈가 녹아 내릴 분노와 부끄러움이다. 조선은 왜구를 물리친 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이 되어 죽도를 수군 기지화 했던 것이다.
400여 년의 세월 속에 말없이 강물은 흐르고 김해부민들은 부산시민이 되었다. 김해부 수군(水軍)의 시설은 읍지』에 “고종(高宗) 광무(光武) 원년(元年) 을미(乙未)에 폐지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광무 원년은 1897년으로 정유년이다.

금천교金川橋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쉰 네 번째

금천교는 김해시 부원동과 부산시 강서구의 경계를 이루는 금천(金川)을 건너는 다리로, 규모는 크지 않아도 그 역사가 오래다. 금천의 이름은 가락국이 쇠를 생산가공하는 기술이 뛰어나 그 쇠를 외국에 까지 수출하였음을 전해주는 작지만 당차고 아름다운 하천이다. 우리 말 이름인 '쇠내’ 로도 친숙한데, 주민들은 이 쇠내에서 조개를 잡아 생계를 이어 왔으므로 ‘재첩동네' 라 불렀다. 1970년대 까지도 이곳에서 잡은 재첩을 동이에 이고 팔러다닌 아주머니의 '재첩 사이소' 삶의 노래가 가슴을 적신다.

금천교(金川橋) - 배 전裵 婰

金川橋畔雨招請 금천교반우초청
外竹村邊落照生 외죽촌변낙조생
謝練澄江三十里 사련징강삼십리
輕舟如剪月中行 경주여전월중행

쇠내 다리 옆 비 개이자
멀리 죽림마을에 석양이 생겼다.
비단결처럼 맑은 강 삼십 리에
가벼운 배 화살같이 달 향해 간다.

무제(無題, 김해 노래) - 송득사宋得師

山秀雲生畵 산수운생화
天遙海接空 천요해접공
脩掌綜砌碧 수황요체벽
佳樹滿庭紅 가수만정홍

아름다운 산에 구름이 그림을 그리고
하늘 아득한데 바다는 공중에 닿았다.
긴 대나무밭 섬을 푸르게 둘렀고
아름다운 나무가 뜰 가득히 붉게 물들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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