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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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流配地 도화동桃花洞영모대水素臺

김종간의 미친 소리 마흔 네 번째

가락국 도읍지 김해에 유배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일반 시민들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김해는 과거에도 오지나 외딴 섬 등 다른 유배지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요로운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배객들이 거처했던 곳도 김해읍성 가까운 마을이었다.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과 동부승지(同副承旨) 정형익(鄭亨益)이 김해부의 도화동(桃花洞, 지금의 서상동)에서 1533년과 1721년에 유배생활을 했다. 포의 이학규(李學達)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1801년 10월에 김해로 유배를 왔다.
정광필은 그의 후임으로 영의정이 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를 받아 1533년 71세의 나이로 유배 와서 1537년까지 4년여 동안 생활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죽고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그 다음해 76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유배생활중 도화동에서 쓴 시(詩)가 『읍지』에 전해지고 있다.
정형익은 1664~1737년의 조선 후기 문신으로 171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동부승지를 지내고 경종이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서 지냈다. 1721년 경종이 생모인 희빈(禧嬪) 장씨(張氏, 장희빈를 위하여 호(號)를 정하고 사우(祠宇)를 세우려하자 불가함을 주장하다 신임사화(辛壬上過) 때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영조 즉위 후 1725년 풀려나 대사간으로 기용되고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73세로 죽었다.
고종 13년인 1876년 그의 5세손인 정숙조(鄭肅朝)가 김해부사로 와서 조상을 추모하는 글을 바위에 새겼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도화동의 영모대(永慕臺) 세 개의 바위 한곳에 새겼음을 느낄 수 있을뿐이다. 정숙조 부사는 남반(南班) 출신으로 1876년 5월 4일 금천군수(金川, 황해도)에서 도임하여 연자루를 중수하고 두 아래에 못을 만들었으며 가난한 부민들을 진휼하였다. 1878년 6월 20일 임피현감(臨肢, 전북 옥구군 임피면)으로 옮겨 갔다. 이학규 역시 1824년 4월 풀려 났으니 김해는 모함과 음모에서 벗어나는 새로움의 유배지였을까.
도화동은 복숭아나무가 많아 꽃이 피면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곳에는 영모대(永慕臺)가 있었고 그 곳에는 부암(父巖), 모암(母巖), 자암(子巖)이 있었는데 왜 영모대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락국 때부터 있었다는 세 바위의 구전과 함께 가락국 도읍지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도화동이었고 영모대였을 것이다. 영모대 자리에는 1894년 김해교회가 들어서고 1907년 합성학교가 들어서면서, 이름도 복숭아꽃과 바위도 모두사라졌다.
임금과 백성을 위해 관직에 있다 모함과 옳은 소리로 유배 당했다가 다시 복권 복직을 통해 중용되었기에, 그들에게 김해는 잠깐의 시련을 견디게 해준 축복의 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옛 도화동의 복숭아꽃 과 영원히 사모하는 세 개의 바위를 생각하며 정광필의 유배 생활을 시(詩)로 만나 본다.


유배(流配) - 정광필鄭光弼

積謗如山竟見原 적방여산경견원
此生無計答天恩 차생무계답천은
十登峻嶺雙垂淚 십등준령쌍수루
三渡長江獨斷魂 삼도장강독단혼

漢漢高峯雲發墨 막막고봉운발묵
茫茫大野雨飜盆 망망대야우번분
賽投臨海東城外 모투임해동성회
草屋蕭蕭竹作門 초옥소소죽작문

비방(非謗)이 산처럼 쌓였으나 근원을 아니
이 생애 임금님 은혜에 보답 할 길이 없구나.
열 번 높은 재를 넘으며 두 줄기 눈물 드리우고
세 번 긴 강을 건너며 홀로 혼을 끊는 슬픔이어라.

아득한 높은 봉우리에 구름은 먹물을 뿌린 듯하고
넓고 넓은 들녘에 비는 동이로 퍼붓는 듯하다.
저녁에 바다에 임한 동쪽 성 밖에 이르니
초가집 쓸쓸한데 문은 대나무로 만들었구나,

정광필은 김해에서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따라서 '유배' 라 제목한 위의 시(詩) 두 편 외에도 여러 수의 한시를 남겼다. 주로 김해의 풍광과 함께 멀리 남도 끝자락에 홀로 유배된 처연한 심사를 담아내었다.

故國淸秋晩 고국청추만
新晴跳望虛 신청조망허
野田黃稻亞 야전황도아
言路碧梧疏 관로벽오소

옛 나라 맑은 늦가을
쾌청하여 허공을 바라본다.
들녘의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관아 가는 길에는 벽오동이 드문드문.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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