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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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대蒜山臺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마흔 두 번째

산산대는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 앞에 있다.
옛날에는 낙동강 가의 작은 섬으로 녹산의 범방대(泛防臺), 부산 사상의 강선대(降仙臺) 등과 함께 경승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산산대 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면 낙동강 본류가 갈라져 이룬 삼차강(三叉江)을 돌아 칠점산(七點山)으로 뻗어 흐른 물길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중종(재위 1506~1544) 때 전라우수사를 지낸 류 용(柳塘)이 이곳에 대(臺)를 쌓아 낙오정(樂吾亭)을 지었다. 그의 아들 전주판관(全州判官) 류제종(柳諸宗)이 왜의 상인으로부터 연철(野鐵)을 많이 사들여 이곳에서 취련(吹鍊)하여 은(銀)을 제조하다가 발각된 사실이 중종실록』 34년의 기록에 전하고 있다.
산산대의 경승보다 역사의 문화향기를 더욱 높이고 있는 것은 이곳 마을인 마산(馬山)의 산산창(蒜山創)이다. 영조(英祖 20년 (1744)에 이곳에 쌀과 소금을 저장하는 산산창을 세웠다.
명지도(鳴旨島, 1978년 2월15일 김해군 명지면에서 부산시로 편입)의 소금 굽는 염간(干)을 상대로 소금 2석을 쌀 1석과 교환해 주고 그것을 저장했다. 처음에는 산상창 별장(別將)을 두고 소금의 관리를 전담케 하다가 김해부사의 소관이 되었다. 영조 39년(1763) 다시 감영(監營, 관찰사)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매년 이곳 창고의 쌀 1,500석을 염간의 식량으로 나누어 주고 소금은 매년 봄에 2,000석, 가을에 1,000석을 모아서 낙동강 상류로 싣고 가서 판매하도록 하였다.
공염(公鹽)을 발매하기 전에는 개인의 소금 매매를 금지했기 때문에 강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고 정조실록 11년 4월에 기록되어 있다. 산산대의 낙오정과 마산 마을의 소금창고는 그 자리만 남았지만, 옛 가락국의 힘인 철과 소금의 향기를 산산대 시(詩)를 통해 다시 느껴본다.

산산대(蒜山臺) - 조이추曺爾樞

江山活畵卽天開 강산활화즉천개
景物接人晚上臺 경물료인만상대
八九胸中添絶灑 팔구흉중첨절쇄
祇疑身世在蓬萊 기의신세재봉래

강산은 살아있는 그림이라 하늘이 곧 열리고
경물에 취해서 늦게야 대에 오른다.
대부분의 가슴에 깨끗함이 그칠 줄 모르고
다만 몸이 선경에 있는지 의심한다.
작가 조이추는 앞에 실린 '금릉팔적' 편의 ‘초선대 시에서 소개한 바 있다.


봉황대鳳凰臺와 김해패총金海貝塚 산책散策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마흔 세 번째

김해 최고의 보물 중 하나로, 가야의 역사와 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해도 좋을 중요한 유적이다. 푸른 숲이 우거져 시민의 허파 역할을 하는 힐링 명소이기도 하다.
가락국 시대 황제(黃洗)장군과 여의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봉황대의 신비로움을 노래한다면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회현동 패총(김해패총)의 존재는 가락국 고도 김해의 위상을 높여 줄 뿐 아니라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으라고 2천 여 년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시대 세 번에 걸쳐 조사한 일본의 고고학계는 그 무엇을 찾고자 했고 찾았을까. 이곳에서 처음 발굴되어 낙동강 하류지역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 회청색 경질토기를 고고학계가 '김해 토기'라 부른 것은, 단순히 그 장소만을 의미한 것일까? 중국 왕망시대(王莽時代, AD
19~22)의 화폐 화천(貨泉)은 왜 이곳에서 발견되었을까?
가락국이 창국되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언제부터 중국과 교역했고 교역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선사시대(先史時代),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등 다양한 유물을 쏟아낸 패총은 일제 때인 1933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고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1963년 1월 21일 다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해시는 2006년 패총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무인박물관 형식의 패총전시관을 개관하여 누구나 땅 밑 패총의 실제 단면을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정현석 김해부사가 독뫼의 모습이 봉황의 날개를 펼친 모양이라고 봉황대(鳳凰臺)라고 했다는데 '황' 자가 '암봉황 황(凰) 자인 것은 여의낭자를 위한 배려였을까?
21세기에 유행하고 있는 “2%가 부족하다.”는 말은 상업문화에서 비롯되었겠지만, 봉황대와 김해패총이란 위대한 유산 앞에 우리의 자세는 많이 부족하고 부족하다. 고상가옥 몇 채와 패총 전시관 정도가 봉황대 유적의 '모든 것' 인양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학자는 발굴과 발굴 보고서를 끝으로 손을 놓고 정부 역시 유물을 박물관과 수장고에 넣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가야사 연구의 현주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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