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ㅣ 서양화가. 학력: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미술교육학 석사. 한국ㆍ충북ㆍ음성미술협회회원, 충북미협원로작가, 한국미술교육학회 충북지부장 및 이사역임. 작가경력:미술협회회원전 1976년 부터 현재까지 45년간 200여회출품 / 청주공예비엔날레 초대작가전, 아름다운 청주전 출품 / 광복50주년기념 도내작가초대전 출품 / 청주 현대미전초대작가전, 곡우회전 출품, 현대작가초대전 / 청주교육대학교발전기금조성전 출품 / 충북초등미술교육연구회전, 음성군미술교사회전 출품 외 다수 개인전 1회, 4인전 1회, 6인전 1회

 

 

연초에 시골집에 어머님과 이웃에 사시는 형님을 뵈러 갔다. 늘 그래왔듯이 제일 먼저 집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구순이 넘으신 노모가 사시기 때문에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안채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은빛 찬란한 스테인리스사발에 시선이 꽂혔다. 어린 시절 팔남매의 숨바꼭질 장소로도 쓰였던 장독대이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가장 커다란 씨간장 항아리 그 위에 살얼음이 살짝 낀 큼지막한 스테인리스사발 하나 바로 정화수였다. 집에 들를 때마다 보곤 하는 정화수였다. 그러나 오늘 본 정화수는 명치끝이 찡하고 눈물이 찔끔, 콧물까지 쪼르륵 흘렀다. 오늘 같은 엄동설한에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음은 물을 갈아 놓으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구십이 넘으신 어머님께서 어김없이 치성을 들이신 것이다. 우리 집엔 어머님께서 살림을 나실 때 할머님께서 물려주신 큼직한 사발이 있었다.
봄, 여름, 가을에는 福자가 새겨져 있는 그 하이얀 사발을 사용하는데 겨울인지라 얼어 깨지기 때문에 스테인리스 사발로 바꾼 것이었다. 팔남매를 위해 빌고 또 비신 것이다. 이른 새벽 살을 에는 추위에도 늘 새로 물을 갈아 놓으시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늘 장독대 그 자리에 놓여있던 하얀 사발이다. 그 하이얀 사발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기차 통학을 했던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야 했다. 첫 기차가 6시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차는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구별 없이 같이 운행했기 때문에 청주까지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래서 한겨울에는 초승달이나 샛별이 떠 있을 때 일어나야 했다. 우연이 일찍 눈을 뜬 어느 날 뒤뜰 장독대에서 중얼거리는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살사이 명함 한 장 크기로 붙여 놓은 유리판을 통해 장독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직 여명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겨울 새벽 살을 에는 찬 공기를 맞으시며 어머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치성을 드리고 계셨다. 어머님은 팔남매를 기르시며 온갖 어려운 일들을 무수히 겪어내셔야 했다. 정화수는 샛별과 달빛을 머금은, 해뜨기 전의 최초의 순수한 물을 의미한다. 엄동설한 추위 속에서도 이른 새벽 우물가에서 정화수를 길어 올리시던 그 정성으로 우리를 길러내신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어려움도 닥친다. 한번은 아내가 몹시 아파 서울 삼성병원까지 실려 갔던 적도 있다. 그때도 어머님은 계속 며느리의 빠른 건강회복을 염원하셨다. 그 힘들었을 때도 이른 새벽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리셨을 어머님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님은 지금 홀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아무리 모시겠다고 해도 고향에서 사시는 게 더 편안하다 하신다. 만성관절염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자식들을 위해 농약 한번 치지 않고 텃밭을 가꾸신 농산물을 나누어주신다. 어머님은 아내에게 오래된 하얀 사발을 하나 주셨다. 아버님께서 50년대에 밥사발로 쓰시던 것이었다. 어머님의 정화수 이야기를 알고부터 아내도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물을 받아 조리대 옆에 놓는다. 언제나 어머님을 생각하면 늘 명치끝이 시려온다. 나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지만, 어머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가기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얼마 남지 않으신 어머님의 여생, 지극한 정성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석가의 말씀에 어버이가 자식을 낳는 것, 열 달이나 뱃속에 품어 중병이나 걸린듯하고, 낳는 달에도 어머니는 위태롭고 아버지는 두려워하여, 그 실정을 이루 말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그리고 낳고 나서는 자식은 마른자리에 옮기고 어머니는 축축한 곳에 누워 있으며, 정성이 지극하기에 피가 변해 젖이 되며, 쓰다듬고 닦고 목욕시키며, 옷 입고 밥 먹는 것을 가르친다. 자식의 얼굴이 즐거우면 어버이도 기뻐하고, 자식이 혹시 근심에 싸이면 어버이의 마음도 애가 탄다. 외출하면 사랑해 생각하고, 돌아오면 잘 키우고자 애써서 마음에 걱정하여 행여 악해질까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라고 했다.
요즈음 고향에 가보면 쓸쓸하기 그지없다. 시골에는 노인 분들만이 굽어진 허리에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시고 고향을 지키신다. 모두 우리의 어버이들이시다. 이런 노부모님께 물질적으로만 봉양하여 효를 행하였다고 착각하는 자식들이 주변에 많음은 실로 안타깝다. 공자께서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봉양만 하는 것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하였다. 송강 정철의 시조가 뇌리에 스치운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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