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이어서>>>

1. 남명선생 주요연보
조식(曺植, 자 건중(仲), 호 남명(南冥))1501 [연산군 7년, 홍치(弘治) 14년] ~1572 [선조 4년 융경(降慶)6년]1세(1501년)6월 26일, 삼가 토동의 외가에서 아버지 언형(彦亨)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충순위 (忠順衛) 국(菊)의 따님이다.
6세(1506년)시와 글을 접하면 곧 외우고, 놀이개를 가지고 놀지 않았으므로 부친이 특별히 사랑하였다.
19세(1509년)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으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므로, 조금 차도를 보이는 듯이 꾸며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태어나게 함에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부여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오늘 요절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다.
18세(1518년)아버지의 벼슬을 따라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함경도 단천군수로 부임하게 된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갔다가, 아버지의 임기가 다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성수침, 성운 등과 교유하였다.
19세(1519년)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것을 목격하고 벼슬길이 기구함을 알았다. 이 때에 남명의 숙부 언경(彦卿)도 일당으로 몰려 파직 당하였다.
20세(1520년) 사마시(司馬試)와 문과한성시(文科漢以試)에 합격하였다.
21세(1521년)
 이 해에 기묘사화에 연루된 자들에게 추가로 죄를 물었는데, 이를 보고 남명은 과거를 통하여 벼슬살에 나아가는 것은 대장부가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여겨 사마시를 포기하였다. 다만 부친이 과거 시험을 독려하므로 동당시(東堂試)는 포기하지 못했다.
22세(1522년)
김해의 남평 조씨 충순위(順衛) 수(騎)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25세(1525년)벗들과 함께 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치음으로 《성리대전》을 읽었다.
그 중에 '이윤(伊丹)이 뜻한 바를 뜻으로 하고 안연(顔淵)이 배운 바를 배워야 하니, 벼슬에 나아가면 이루는 일이 있어야 하고 산림에 처해서는 지키는 바
가 있어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벼슬에 나아가서 이루는 일이 없고 산림에 처해서 지키는 바가 없다면 뜻한 바와 배운 바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라는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아 벗들과 이별하고 성현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직접 공자(孔子) ·주렴계(周廉溪)·정명도(明道)·주자(朱子)의화상을 그려서 이를 병풍으로 만들어 책상 앞에 두고 때때로 펼쳐 엄숙한 모습으로 대하였다.
26세(1526년)아버지 판교공이 세상을 떠남에 고향에 모셔 장사지내고 삼년상을 지냈다.
여묘(廬墓) 생활에서는 몸에서 상복을 벗지 아니하고, 발은 여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 때 남명의 아버지는 제주목사로 임명 받았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좌천이라고 여겨 부임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모든 벼슬을 삭탈하였는데, 곧 이어 세상을 떠났다. 뒤에 남명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판교 이하의 벼슬이 모두 회복되었다.
28세(1528년)아버지의 삼년상을 벗고, 직접 부친의 묘갈명을 지었다.
29세(1529년)의령의 자굴산에 있는 명경대(明鏡臺)를 왕래하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1530년)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김해로 이주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강학하였다.
거주하는 방을 계명(繼明)이라 이름하고는 강학하면서 안으로 덕을 쌓으면서 밖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때에 자신의 호를 남명(南冥)이라고 하였다.
성운, 이원, 신계성, 이희안 등 당대의 명유들이 찾아와 교유하였다.
31세(1531년)동고 이준경이 보내 준 《심경》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32세(1532년)규암 송인수가 보내 준 《대학》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33세(1533년)가을에 향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34세(1534년)봄에 명경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36세(1536년)아들 차산(大山)이 태어났다.
37세(1537년)어머니에게 청하여 이후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에 대해 허락 받았다.
이 때 정지린이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니 처음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 하였다.
38세(1538년)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어나 나아가지 않았다.
43세(1543년)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감사가 되어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만나지 않았다.
44세(1544년)아들 차산이 요절하였다.
벗 이림이 선물한 《심경》에 대하여 느낌을 적었다.
45세(1545년)을사사화가 일어나 절친한 벗들인 이림, 곽순, 성우 등이 화를 당하였는데,남명은 이를 매우 슬퍼하면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11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다음호계속>>>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