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제 1 회 남명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우수상 수상작 I

최 주 철
최 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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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교장은 이리 교육대 시절 3연대장이었다. 지금은 사관학교 교장이었다. 나는 이리 교육대에서 연대장 관사를 심부름으로 드나드는 유일한 후보생 중 하나였다. 그래서 거드름을 피웠다. 내 말에 아주머니는 단번에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우리 장사를 계속해도 되겠네?”라고 하면서 화색이 돌았다.
“물론이죠 계속 돈 벌게 해 주겠습니다.”. 라며 속삭이듯이 내가 말했다.
그날부터 나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빵을 원 없이 사다 먹는 특혜를 누렸다.

우리 후보생 내무반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때문에 내무반을 가려면 1층 현관을 통과하게 돼 있었다. 현관에는 언제나 불침번이 지키고 서 있었다. 물론 좌우측 계단에도 동초 근무자가 있었다. 그러니 빵을 나르는 일이 문제였다. 나는 궁리 끝에 건물 뒤편으로 가서 내무반원들이 태권도 도복 끈을 연결해서 기다란 끈을 바닥으로 내리도록 해서 빵 보따리를 매달아 올려놓고 현관을 통과했다.

어느 날 내가 빵을 사들고 화장실 모퉁이를 막 돌아서려는데 훈육 장교와 맞 딱 뜨렸다. 훈육장교가 소문을 듣고 미리 잠복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다. 순찰 때 우연히 마주쳤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붙잡혀서 훈육관 사무실로 끌려갔다. 따지고 보면 별게 아닌데도 당시에는 대단한 교칙 위반이었다. 그런 행동은 퇴교 감이었다.

당시 윤배근 훈육 대장은 빵 보따리를 보더니 “그걸 어떻게 샀냐?”라고 물었다. 나는 무척 긴장했다. 이런 때는 솔직하게 이실직고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변명하며 우물거리는 것은 더 사나이답지 못하고 사태를 악화 시킬 수 있다고 판단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윤배근 훈육 대장은 말했다.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했다.

“후보생인 줄 알고 파더냐?”
“아닙니다. 제가 김백일 교장선생님과 친척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맹량한 놈이군, 그래 얼마 동안 그 짓을 했나.”라고 재차 질문을 했다.
“수십 번 했습니다.”
“허허 갈수록 태산이군. 적발되면 퇴교 당할 수도 있다는 것 몰랐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먹는 내무반원을 보고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네 말 투를 보니 강원도가 고향이구나.“그 역시 강원도 속초가 고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살았다”하며 여러 가지 고향 이야기를 했다.

“좋아. 큰 목적을 위해 입교했으니 고작 빵 몇 개 사 먹고 퇴교당하면 되겠나.”
“솔직한 면도 맘에 들었다.”
“동료들을 위해 나선 것도 좋지만 배고픔을 참는 것도 훈련이다.”
“이번 만은 봐 준다. 돌아가라.“그러나 빵 보따리를 가져갈 일이 문제였다.
“훈육 대장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빵 보따리를 어떻게 할까요?”
“가져가.”

빵 보따리를 들고 내무반으로 돌아오자 내무반원들은 사지에서 돌아온 혈육이라도 만난 듯이 나를 반겼다. 돌아올 시간이 됐는데도 오지 않으니 그들은 사색이 다 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내막을 설명했다.
“내가 누구냐. 새로 시작한 거야.”하고 그들을 오히려 위로했다.

교도대 병사로 있다가 7기생으로 입교한 김동익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강원도 양양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교회 권사여서 고향도 같고 같은 기독교인이어서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는 1중대였는데 나의 빵 사건을 어떻게 듣고 찾아왔다.

“상웅아, 그렇게 배고프면 내일 저녁 7시에 학교 위 장작 쌓아둔 곳으로 와”라고 했다. 나는 그가  말 한 대로 그 시간에 가기 위해 취사반 쪽으로 갔다. 취사반은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교도대 창고를 돌았다. 장작더미가 있었다. 김동익이 어둠 속에 반합 두 개와 국그릇을 들고 왔다. 반합에는 밥이 가득 담겨 있었고 국그릇에는 소금국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반합 속의 밥은 4인분 이상 돼 보였다. 금방 저녁밥을 먹었는데도 그와 나는 반합 하나씩 앞에 놓고 큰 솓 가락으로 밥을 퍼먹어가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반합의 밥을 다 먹어치우니 저녁 한 끼를 3인분은 먹은 셈이었다. 배가 산만큼 부르고 온몸이 늘어져 버렸다. 김동익은 교도대 병사로 있을 때 취사반이었다. 그래서 후보생이 된 지금 옛 동기 병사들로부터 별도로 밥을 얻어 왔다. 나는 고향 친구 덕으로 원 없이 밥을 얻어 먹었다. 후보생 시절은 이처럼 먹는 것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47년 12월 어느 날 청산리 대첩의 영웅 이범석 장군과 송호성 국방경비대 육군 총 사령관 임석 하에 사관학교 교정에서 생도 분열식이 있었다. 이법석 장군은 조선민족 청년단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국방 경비대는 각 도에 하나씩 연대를 창설해 나가는 중이었다.

합법기구는 미 군정하의 조선 국방경비대였지만 나라가 정식으로 서지 않은 때라서 광복군. 족청. 대동청년단. 정통단. 학병단. 학도대. 대한 무관학교 등 30여 개에 달하는 군벌 성격의 군사 조직이 난립해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다.

사관학교 생도들이 집합하고 사열대에 이범석 장군. 송호성 총사령관. 김백일 교장 등 군 간부들이 입장하고 순서에 따라 이범석 장군이 훈화를 하기 위해 단 앞으로 나섰다. 그런대 그의 일성은 의외였다. “송호성 총사령관은 단을 내리라!”

그 많은 후보생들 앞에서 육군 총사령관에게 무 자르듯 단을 내려가라고 하다니. 또 그 말을 듣고 총사령관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군 내부의 복잡한 사정을 알 수 없는 후보생들은 이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국방경비대도 광복군. 파로군. 일본군과 만주군. 학도병 출신 등 복잡한 계보와 파벌로 얽혀 있었다. 통의 부장이 광복군 출신의 유동일 장군이고 48년 국가가 수립되면서 이범석 장군이 초대 국무총리에 국방장관을 겸했다.

이렇게 나는 1948년 12월 17일 6기생 졸업식과 함께 소위로 임관된 생도들은 각각 부대 배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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