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김종간 향토사학자

초선대(招仙臺) - 조이추曺爾樞

加耶古國鐵寒烟 가야고국쇄한인
海上高臺獨歸然 해상고대독규연
王業吾知如是止 왕업오지여시지
不招賢者反招仙 불초현자반초선

가야 옛 나라 찬 안개에 잠기고
바다 위 높은 대(臺) 홀로 우뚝하구나.
왕업은 내 알 듯이 이와 같이 그쳤으니
현자를 부르지 못하고 초선대를 돌아온다.

작가 조이추는 김해 삼안동 출신으로 1671~1707년의 인물이다.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읍지』 인물(人物) 조에 실려 있으며 성리학자로서 당대 고을 최고의 사림(士林)이었다. 숙종 33년(1707)에 47세로 죽자 사림에서 예암사(禮岩祠)를 세워 향사 하였으니 그의 행의(行記)가 대단했음을 느낀다. 작가는『읍지』에 ‘초선대'와 '구암암(龜巖庵, 지금의 영구암)', '산산대(赤山臺)' 등의 시를 남겼다.

 

돌아서는 발길에 푸른 숲에서 가야금 소리가 들려온다. 가락국 2대 거등왕이 초대한 참시선인이 켜는 가야금 소리다.
가야금은 우륵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가야국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호통소리가 들린다. 해지는 서쪽을 향해선 마애불이 저녁놀을 뚫고 호통을 치고 있다.

역사서로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3월 조에
- “가야국의 가실왕이 열두달을 상징하는 음률(가락)을 위해 12줄 금(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그 곡조를 짓도록 하였으나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나라로 투신해 왔는데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 이다.”

이 기록에서 분명한 것은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고 그 곡은 우륵이 만들었다 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까지도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하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두 번째로 부끄러운 일은 가실왕이 가야국인데 6가야국 중 어느 가야국이라고 적고 있지 않다고 하여 왜곡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리 고령현 고적 금곡조에 “가야국 가실왕 악사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 “김해의 가야국에는 가실왕이라
일컫는 임금이 없으므로 가야금이 이곳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것.”이라고 했다.
옳지 않은 기록이다.
김해의 가야 즉 가락국에 「가락국기」에서는 가실왕이 없다.
그렇지만 고령의 대가야에도 가실왕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 완성되었다. 성종 12년(1481)부터 1차, 2차, 3차의 증보를 하여 완성된 것이다. 가락가야 즉 김해의 옛 가야로 주장하는 것은 고려때 편찬된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 다음으로 오래된 『경상도지리지의 기록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세종 7년(1425)에 편찬된 <김해도호부 영이지적 조에 “가야국의 가실왕이 12줄 금(琴)을 만들었는데 열두달을 음률로서 상징하고자 우륵에게 명하여 그 곡을 만들게 하였는데, 급기야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으름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전수 하였는데 지금의 가야금 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의 신라본기 진흥왕12년 조와 같다. 가실왕은 가락가야국의 임금임을 보여주는 역사의 증언이다. 초선대의 가야금소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득한 옛날 천지의 조화로 만들어진 초선대는 사방이 물과 갈대였다. 외로운 섬은 나무와 풀과 바위로 나그네를 부르고 왕을 부르는 경승이었고 지금은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는 개발 욕심에 공장과 차량의 소음과 하늘의 비행기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조선대는, 세월을 잉태한 나무와 바위와 풀은, 장유화상(長遊和尙)으로 전해오는 마애불(磨崖佛)과 함께 인간의 고된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잠시 땀을 식히고 마음을 식히라고 손짓한다.
고맙고 또 고마워 초선대가 김해와 함께 천년만년 오래 건강하기를기원하며 두 손을 가슴에 모은다.


                                                                 다음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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