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창 우   (시인. 기행문)
송 창 우 (시인. 기행문)

김해는 옛 금관가야의 도성으로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비롯하여 대성동 고분군, 봉황동 패총 등 가야유적지가 있다. 봉황대가 있는 봉황동 유적지는 봉리단길이 조성되고 있으며 옛 궁궐터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젊은 층과 전국 관심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봉황대는 릉의 형세가 봉황이 날개를 편 형상과 같다 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된 것이라 한다. 최근 가야 문화 환경 정비 사업으로 발굴과 복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새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을지 궁금증이 일어 주말을 맞아 봉황대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번잡한 도심을 끼고 흐르는 해반천을 거슬러 봉황대로 발길을 옮겼다. 따뜻한 날씨에 이곳은 시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즐기는 곳이다. 코로나 여파와 초겨울이라 차가워진 바람에 뜸한 인적은 옷깃을 세우게 한다. 해반천은 90년대까지 현 내외동 일대 농지에 농수를 공급하던 하천이었다. 가재와 붕어도 잡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곳이다. 이제는 택지조성으로 농지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해반천은 농수를 공급하던 역할에서 시민의 휴식처로 탈바꿈하였다. 오랜 하천 정비 사업으로 지금은 김해 시민이 소중하게 여기는 명소가 되었다. 계절 탓에 줄어든 물은 쉼 없이 바다를 향하고 휑한 둑방길은 겨울잠에 들었는지 발걸음을 지워버렸다.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소리에 언 가슴에 온기가 돈다. 해반천을 따라 걷다 보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임호산이 자리 잡고 있다.

임호산은 높지 않은 산으로 등산과 운동을 즐기는 시민들이 찾는 곳이다.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남쪽으로는 김해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으로는 봉황대와 수로왕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아마 그 시기에는 궁궐의 웅장함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 흥부암興府庵이라는 사찰이 있다. 흥부암은 지형의 기세가 강하다 하여 수로왕의 지시로 장유화상이 산의 호랑이 입 부분에 사찰을 지었다 한다. 나쁜 기운을 누르고는 왕실의 안녕과 가락국 부흥 의미를 담아 흥부암이라고 붙였다 한다. 2천 년 세월동안 창건 당시 역할을 사찰은 변함없이 하고 있지 않나 싶다. 풍수에 해박한 지식은 없지만, 시골 소도시가 인구 53만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을 보면 수긍도 간다. 부산, 창원의 위성도시지만 문화도시로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길 기대해본다.

해반천을 벗어나면 김해도서관 맞은편에 봉황대가 있다. 넓은 잔디광장 지나 숲길을 가다 보면 기마무사 상이 용맹스럽게 지키고 있다. 철의제국답게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기도 하다. 특히 대성동 고분군에는 덩이쇠가 많이 출토되었다 한다. 덩이쇠는 그 당시 화폐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이 외에 갑옷과 투구, 철제무기들이 출토되어 왕성한 정복 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망루를 지나 오솔길을 오르면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설화가 담겨있는 황세바위가 있다.

황세바위가 있는 봉황대 유적지는 동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리는 아름답고 가슴 아픈 설화가 이곳 안내문에 잘 설명되어 있다. 봉황대를 찾지 않았다면 역사책에 나오는 평범한 조개무덤 유적지로 알았을 것이다. 지역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다는 자괴감은 황세바위가 발걸음을 잡는다. 내려다보이는 구시가지 속 수로왕릉은 개발이란 미명아래 담장 속 또 다른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찬란한 가락국의 문화유산이 잠자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왕릉을 매개체로 주위를 복원하여 현재 발굴이 끝난 옛 왕궁터와 봉황대를 연결하는 역사가 숨 쉬는 거리로 만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많은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 있고 대도시와 인접한 지리적인 이점도 가지고 있다. 역사적 테마 거리로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이 김해를 찾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황세바위를 뒤로하고 정상부 왼쪽으로 돌아가니 여의낭자 정절을 추모하는 여의각이 있다.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한다. 한 여인의 애달픈 사랑에 가슴이 저민다. 신의를 저버린 부모의 그릇된 욕심이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해반천을 사이에 두고 지척 거리에 두 여인의 얽힌 사연이 애처롭기만 하다. 해반천 물길은 모른 체 흐르고 있다. 사람의 욕망과 욕심의 끝은 어디인지 씁쓸하기만 하다. 여의각 아래에는 고상가옥과 옛 가야 시대 주거 형태를 복원한 고상 가옥 주거가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가야 시대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반지하 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렸다 한다. 그리고 고상 가옥은 바닥 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져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로 사용되었다 한다. 아마 습한 기운과 동식물의 해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현대의 가옥구조와는 판이함에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고상 가옥을 내려오면 봉황대 입구에 패총 전시관이 있다. 코로나 여파로 전시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모든 일상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봉황동 유적지행은 뜻깊은 탐방길이였다. 지역 문화유산에 대한 무지와 새롭게 접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외감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가락국 역사가 낳은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고찰과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봉황대 초입부터 패총까지 곳곳에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안내문이 이해와 공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역사 복원에 대한 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으며 세심한 배려에 고마움도 들었다. 지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소중하다고 본다. 오늘이 내일 되면 그게 역사가 아닌가? 어제라는 삶의 바탕 위에 오늘의 삶이 그려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삶의 역사도 소중하지만 지역 역사도 현재의 삶과 동행 하고 있으니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의 주도하에 지역주민이 협력한다면 문화적 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김해는 가락국 도성으로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다. 대성동 고분과 수로왕릉 이곳 봉황대를 하나의 문화유적지로 묶어 발전시켰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봉황대 유적지를 둘러보며 복원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모든 분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역사의 도시로 탈바꿈할 미래 김해를 꿈꾸어 본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