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남명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우수상 수상작

최 주 철
최 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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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나뭇가지 틈새로
마알간 해가
용기 하나로 세상을 정복해 간다

세찬 파도가 밤새 울다
조근조근 사연을 털어 놓으려
숨 고르기 한다

이불 푹 덮어쓰고 끙끙 거리던
산자락도 툭 털고 일어나려
움틀 꿈틀 거린다

지평선에 발그레 불쑥 떠오르는 빛
밀어냈다 당겼다 하는 사이
파도는 하얗게 웃는다

날개를 펴 내려 앉은 산자락으로
찬 바람을 후우 불어 주면
조국 수호 사명을
위국헌신으로 응답하라

용사들이여!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여유는 없었다. 기상해서 저녁 점호까지 고된 시간이었다. 중대 훈육관이었던 오종성 장교는 식사시간에 반찬이 단무지뿐일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모처럼  고깃국이라도 배식되면 슬그머니 나타났다.
“후보생들 먹을 만 한가”하고 뒷짐을 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제공한 것처럼 생색을 냈다.
“제군들을 위해 육군소위 오 소위가 분골쇄신 뛰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오종성 소위가 중대 훈육관으로 있다가 보급관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본부 보급관으로 갔다.  어느 날 후생들에게 접이식 미군용 야전침대가 지급됐다. 그중 내 것은 접었다 폈다 하는 부위가 찢어져 있었다. 펴서 누우면 허리가 아플 수 있었다. 그러나 쓸 수는 있었지만 계속 침대를 사용하면 더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들고 오종성 소위에게 갔다.
“충성! 5중대 555번 후보생 보급관님께 용무있어 왔습니다.”라며 큰소리로 보고했다.
“무슨일인가 후보생”라며 오 소위가 물었다.
“훈육관님, 야전침대 교환하러 왔습니다. 이것은 접는 곳이 찢어져서 사용하기가 곤란합니다.”
국방색 야전 침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오 소위가 말했다.
“이 정도로는 바꿔 줄 수 없다.”라며 보급품 보급기준을 설명했다.
“보급품은 A·B·C·D급으로 분류하는데 이것은 B급이다”라며 난감한 표정을 했다.
“곤란하다”라고 대답했다.
“바꿔주십시오”라고 사정을 했다.
그는 “더 파손이 돼야 하는데...”하며 계속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군대란 맞지 않는 옷은 몸을 맞춰 입고 신발은 말을 맞춰서 신으라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러나 잠시 궁리하던 오 소위가 국방색 야전침대를 펴놓고 위로 올라가더니 느닷없이 발로 침대를 내리 밟아 박살을 내고 말았다.
“이렇게 D급 정도는 돼야 바꿔주는 거야.”
그는 그 어려운 처지에도 후보생들의 에로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고 했다.

3연대 교육과정을 거쳐 기차를 타도 태릉 사관학교 이동했다. 우리는 사관학교로 입교한 뒤에도 배고픔을 견디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사실 당시 시대 상황이 어려운 시절이라 누구든지 그랬다.

밥은 8대 2비율로 쌀과 보리가 섞이도록 했지만 꽁보리밥이었다. 식사량이 턱 없이 부족했을뿐더러 보리밥은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솓 가락을 놓자마자 다시 허기가 졌다. 후보생들은 외출 때 시내에 나가 국밥 한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돌아오는 것이 낙일 정도였다.

태릉에서 광화문 서울로 나오려면 마땅한 차편이 없었다. 때문에 지나가는 트럭 화물차를 세워 타고 갔다. 목탄차나 트럭은 서울 시내에서 인분을 퍼 나르는 차량들이었다. 서울 외곽 밭에 인분을 뿌리고 돌아가는 차들인데 우리는 이런 똥차를 위에 앉아 시내로 나가곤 했다. 그래도 그 시간을 많이 기다렸다. 동기생들과 같이 나가 즐기는 시간을 정말 꿀 맛 같았다. 시간도 무척 빨리 갔다. 나는 서울에 나가면 다행히 이모 댁이 있었다. 그래서 늘 그곳을 찾았다.

어머니 바로 위 이모라 내가 가면 항상 잘해주셨다. 나는 이모와 이모부님께 큰절을 했다. 이모는 늘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나 된장국에 돼지고기를 넣어 맛있게 끓여 주시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 친구분이 있었다. 종로에 선생님 댁을 찾으면 사모님은 안쓰럽다며 나에게 쌀밥을 한가득 차려주셨다. 이렇게 주말을 보내고 돌아왔다.

귀대할 때는 차를 몇 번을 갈아타고 왔다. 물론 트럭이 차편이다. 어떤 때는 너무 먹어서 트럭에 잘 오르지 못해 다른 동기 후보생들이 끌어올려 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달에 한 두 번의 일일 뿐 후보생 생활은 여전히 허기진 나날이었다.

유일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매점에서 파는 빵을 사 먹는 일이었다. 빵은 한정되어 있어서 재빠르지 않으면 그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중대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화장실 옆에서 빵 굽는데 구수한 냄새가 입맛을 당겼다. 밤새 쪄낸 빵은 다음날 납작하게 주저앉아 버리는데 그래서 모두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다른 간식이 없던 때였다.

어느 날 나는 밤늦은 시간에 화장실을 갔다. 용변을 보는데 누군가가 빵집으로 다가가 울타리 판자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빵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누구세요?”하고 묻자
“훈육장교요”하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속으로 그래 “옳다”하고 용변을 마치고 나오면서 주변을 눈여겨보았다. 훈육장교는 일석점호가 끝나고 대략 밤 10쯤 순찰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며칠 후 나는 중대 내무반 후보생들에게 제의했다.

“우리 따끈따끈한 빵을 먹자 어때 동의하는가 제군들? 돈은 각출하자.”
우리 내무반은 12명이었다. 돈을 모은 나는 훈육장교가 손찰 돌기 전 그 빵집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서 노크를 하자 과연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훈육장교요.”
그러나 문이 열렸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한눈에도 내가 훈육장교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에그머니나, 생짜 후보생이 이러 시면 안 되는데. 큰일 나요.”라고 했다.
“쉿, 조용히 , 들키면 퇴교되는 것 아시죠?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면 아주머니도 장사 못해요. 아시죠“라며 비밀을 당부했다.
”난 김백일 교장 선생님의 조카요“라고 소개 했다.
”걱정하지 말고 빵을 주세요.“라고 나는 당당하게 주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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