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남명은 당시 기묘(己卯) ·을사(乙巳)·정미사화(丁未士禍)가 거듭되는 정치 상황에서 비록 초야에 처(處)하면서도 세상을 잊지 않는 유학자의 모습을 견
지하여 세상을 맑게 하는 '숙세유(淑世儒)'의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그 평가는 사실과 어긋남이 있었다 하겠는데, 여기에 대해서 지기였던 성운(成運)은 남명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즉 "남명의 깊은 학문과 높은 의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며, 오히려 평판이 사실과 다름을 개탄하고 백세 먼 훗날 아는 자는 알아 줄 것이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김우옹은 〈언행총록(言行總錄)〉에서, 그리고 허목(許穆)은 신도비(神道碑)에서 남명에 대한 거의 같은 발언이 이루어지고 있다. '구차하게 복종하여 따르지 않았고 구차하게 가만히 있지도 않았으며, 높고 뛰어나게 우뚝 섰다'라 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남명의 출처대의를 정확하게 평가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출처는 《주역(周易)》에서 말한대로 '왕후(王侯)에게 벼슬하지 않으면서도 그 하는 일이 고상(高尙)하여' 후세 많은 사람들이 그 대의(大義)를 깨닫게 하였다고 본다.
최근 김충렬(金忠烈)도 그의 《고려유학사》에서 "유교는 입세간적(入世間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이고 윤리도덕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그 정치철학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의 방법론을 가진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이를 추동(推動) 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잘못된 현실이나 궤도를 이탈한 추동에 대한 비판과 함께 깨끗하게 하려는 숙세풍교(淑世風敎)이다. 경세유(經世儒)는 묘당(廟堂)에 나아가 이국치민(理國治民)함을 직(職)으로 하고, 숙세유(淑世儒)는 산림(山林)에 처(處)하면서 풍교(風敎)와 전도(傳道)를 자기 임무로 한다."고 하였다. 이를 참고한다면 남명은 바로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더욱 필요해진 후자의 길, 즉 숙세유의 길을 택했다고 하겠다.

부 록 1
남명의 문인 및 사숙인

1. 남명의 문인

여기서 수록하고 있는 남명선생의 문인은 기본적으로 《덕천사우연원록》에등재된 인물과 순서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덕천사우연원록》에는 135명의 문인 명단을 수록하고 있지만, 그 속에 세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산해사우연원록》의 체제를 계승한 관계로 정인홍을 문인에서 누락시킨 점이고, 둘째는 남명선생 사후(死後)에 출생한 정심(到深)을 문인으로 분류한 것이며, 셋째는 노순(盧)과 노순(虛純)은 동일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으로 착각하여 수록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노순(區)과 정심을 제외하고, 정인홍을 문인의 세 번째로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 수록한 인물은 모두 134명이며, 그 명단과 순서( 《덕천사우연원록》 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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