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남명문학상 단편소설부문 우수상 수상작

최 주 철
최 주 철

 

이어서>>>

 

귀가 멍했다. 그러나 나는 명령했다.
“소대 각자 정위치”를 외쳤다. 사상자를 파악부터 했다.
“분대별 사상자를 보고하라”명령했다. 제일 동작 빠른 2분대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상 무”,
“1분대 이상무”3분대는 대답이 없다.
“3분대장! 김 하사 김 하사”외쳐보았다.
“소대장님! 부분대장입니다.”하면서
“윤 병장이 분대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며 울먹였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디야 어디”
“어떻게 된 거야”소리치며 달려갔다. 그곳에는 사지가 찢긴 참혹한 모습이 눈앞에 들어왔다.

3분대장 김 하사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 감상에 잠길 여유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대원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정 위치”를 반복해서 외쳤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분대장들도 각자 몫을 다 했다. 포대 진지로 정위치 했다. 사수와 부사수 경계병은 훈련한 대로 각자 위치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진정시키고 무전병을 불렀다. P-77무전기를 찾았다. 본부 포대 쪽을 외쳤다.
“박 일병”
“전령”을 찾았다.
박 일병은 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나를 보자 뛰어왔다. 무전기 주파수를 확인하고 키를 눌러 중대에 상황 보고했다. 중대에서 전화를 받은 이는 중대장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사격하라는 것이었다. 화력 계획을 찾았다. 두루마리 작전 계획서를 펼치고 화력 계획 좌표를 확인 하였다. 각 분대장을 소집했다. 각 분대장들은 달려왔다. 3분대장은 부분대장이 왔다. 화력계획을 각 분대별 준비된 명령지를 전달했다.
“즉시 사격 개시하라.”
분대장들은 다시 허리를 구부리고 각자 분대로 흩어 졌다. 잠시 후 사격이 시작되었다. 보유하고 있은 포탄을 모두 사격했다. 보유 탄약은 사실 몇 발 되지 않았다. 탄약 보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우리 진지에 적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구 떨러지는 적에 포화는 천둥이 치는듯 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소대장인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공포를 견디는 병사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잠시 후, 포성이 멈추었다. 무전기도 박살이 났다. 완파였다. 전령을 찾았다. 그러나 전령인 박 일병은 건너편 나무 밑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사상자 보다 생존자를 먼저 찾았다.
“소대장이다. 전원 집합하라.”명령을 하달했다. 목소리를 냈으나 소리가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 질렀다. 분명 소리를 냈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순간 멍해졌다. 소총을 찾았다. 두 발자국 떨어진 소총을 기어가 잡았다. 그리고 소총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천천히 일어나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은 신음소리 뿐이었다.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했다. 1분대를 먼저 찾아 진지로 뛰어 갔다. 그러나 전부 진지에 제 멋대로 누워 있는 병사들은 대답이 없었다. 방열했던 포는 박살이 나있었다. 포열과 포판 그리고 포 다리가 따로 있었다. 다시 2분대 진지로 뛰어갔다. 여기는 더욱 처참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병사들 군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부러진 소총과 덜렁거리는 반합 그리고 야전삽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나는 소총을 떨어뜨리고 끌리는 전투화를 끌며 3분대로 갔다. 그곳에는 신음하는 병사들 몇이 보였다. 약간 후미진 곳에 있었던 3분대는 피해가 적은듯 했다. 나는 신음하는 병사에게 갔다.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배에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고통을 참지 못한 병사는 끝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혼자였다. 털석 주저앉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진지에 두러 누웠다.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포성도 총성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제2장 : 땀에 젖은 빵

  1947년 4월 나는 사관학교 일반모집으로 들어갔다. 때문에 3개월간 사관 후보생 교육대로 갔다. 그곳에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과정을 마쳐야 사관학교에 정식으로 입교하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가 입교 과장이었다. 후보생 교육대는 1연대(태릉), 3연대(전북이리), 5연대(부산) 3곳에 있었는데 나는 3연대에 배치받았다.

교육이라는 것이 일본 구구식 소총을 메고 일본식 훈련받는 것이 전부였다. 교재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구보와 기본 제식훈련을 받았다. 각개전투와 사격술은 기본이었다. 철조망 통과 훈련시에는 훈련복이 흙투성이였다. 달려가면서 사격하는 자세와 권총 사격 요령을 일본 군대식과 미국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군인의 자세와 정신력 그리고 태권도와 격술을 배웠다.

한참 식욕이 왕성한 젊은 나이였다. 당시 급식은 형편없었다. 찐밥에 보리밥 한 그릇에 단무지 몇 쪽이 다였다. 된장국은 멀건 물이였다. 나는 나날이 허기진 배를 어떻게 채울까 고민했다. 훈련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기만 했다. 기상해서 구보했고 훈련 중에 과목별 교장까지 구보로 갔다. 훈련 중에는 선착순도 있었다. 밥 먹을 때 빼고는 온종일 달리는 훈련이었다. 배가 않고픈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우리를 웃기는 교관이 있었다. 그는 수류탄과 크레모아 교육 그리고 장애물 교관이었다. 그는 늘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웃기면서 재미있게 교육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든 훈련과정을 나름 즐겁게 이겨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오종성 장교였다. 그는 주번사관이면 일본도를 차고 긴 장화 같은 군화를 신고 이리 시내 시장을 돌아 다녔다. 물론 자기 관할도 아니었다. 따라서 굳이 나설 필요도 없는데 시장을 한바퀴 돌고 올때가 많았다. 조금만 아는 사람을 만나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육군소위 오 소위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육군 소위 오 종성이라고 해야 했다. 육군 장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얼굴은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키는 매우 작아 볼품이 없었다. 군복이 아닌 사복을 착용하고 나가면 머슴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이름자에도 위관 계급을 댔다. 그와 나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윗사람 행세를 하며 위세를 부릴 때는 우습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장교가 있었다.

나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는 소년병으로 일본 군대 시절 남방으로 배치돼 갔다. 야자수에 달빛이 걸리면 사심이 저절로 우러나서 거기서 가슴 뭉클한 시를 많이 지었다. 그러면서 군사 강화 시간에 자작 시를 낭송했다. 즐길 만한 것이라곤 없는 때 이런 낭만파의 신소리도 우리에게는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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