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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난 5월 발행된 2000년판 외교보고서〉에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명시했는가 하면, 모리 총리는 지난 9월 KBS와의 인터뷰에서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말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바 있다. 심지어 일본 자위대는 '독도 탈환'을 가상한 기동훈련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대응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정부 당국자들은 "일본의 망언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대응하면 오히려 일본의 농간에 넘어가게 되며 독도를 국제사회에서 '분쟁지역'으로 인식시킬 우려가 크다." 라는 말만 반복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근본적인 대책이 없이 안이한 미봉책으로 불씨를 키워갈 것인가?
이 대목에서 일찍이 16세기 중반,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하고 그 싹을 애초에 잘라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던 남명의 혜안과, 임진왜란을 만나 직접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그 문하의 의병장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을 목도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내외의 난제들을 풀기 위해 그들도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평화로운 가운데도 위기를 대비할 줄 알았던 남명의 혜안과, 위기를 만나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남명학파의 실천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중하다는 사실 말이다.

4. 미래 전망을 위한 평가의 재해석

남명의 출처대의 및 실천적 경향성은 특히 사림파의 경세사상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점이다. 그런데 그 진가에 비해 이제까지 학계와 일반인들에게서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하였다. 대체로 학문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였다. 이같은 질곡을 떨쳐 버리고 정확한 연구와 비판을 통해 올바른 학문사상적 재평가가 이뤄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16C 중엽 이후 남명학파의 경세사상 가운데 실학적 학풍은 인조반정으로 인해 제거되어 버리고 보수적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학문적 풍토가 다시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예학(學)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관념화 되어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 진행한 일종의 스콜라 논쟁이 현실과 민중을 외면하여 유학의 근본이념을 배반하였다.
또한 경신대출척(庚申大:1680년)과 갑술옥사(甲戌獄事:1694년) 이후로 이미 훈척파가 되어버린 서인의 노론보다는 비교적 양심적이었던 온건 개혁파 였던 남인마저도 정권에서 탈락되어 버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후기 실학파는 정권에서 탈락된 바로 이 근기지방(近畿地方)의 남인들과 그 후에들을 지칭하고, 실학은 그들의 학문적 성향, 즉 사회 정치사상에 있어서 유학의 수 기치인 가운데 치인의 입장에 충실한 것을 일반적으로 말한다.
남명과 남명학파의 학문사상은 현실 자제의 개혁을 통해 자신들이 이권을 쟁탈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보다. 유교 정치사상의 원칙론에 입각하여 민중을 위한 '민본'을 입론의 토대로 한 것이기에 비교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비록 소외와 탄압을 받았지만 그것이 바로 역사 발전의 추동력이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실학자 이익(李象)이 경학(經學)과 성리학을 두루 섭렵하면서 주자를 신봉 했지만, 그 경전 해석에 있어서는 실지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주자학만을 신봉하고 여타 학문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배척한 보수파의 모습, 다시 말해서 비실학적 태도의 전형적 모습은 송시열(宋時烈) 등이 대표적으로 이어 받아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학문사상적 테러를 감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남명과 남명학파의 실학적 학문 경향성과 유학의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사상을 오늘날 정치현실에서 더욱 반성적인 고찰과 함께 미래지향적 발전과 실천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 가능성을 《명종실록》에서 사관(史官)이 남명의 학문과 출처를 평가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당시 유일(遺逸)에 가탁(假化)하여 실제 학덕을 갖추지 않고 한갓 헛된 이름으로 도명기세(盜名欺世) 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남명은 자신을 다스려서 깨끗함을 지켜 초야(草野)에 묻혀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관직이 누차 제수되었으나 안빈자락(安貧自樂)하여 끝내 벼슬하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식은 결코 세상을 잊지는 않았다. 상소문을 올려 당시 폐단에 대해 힘을 다해 논함에 있어 그 말이 간절하고 그 의(義)를 올바르게 하였고, 시대를 상심하고 난(亂)을 우려하여 임금을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풍화(風化)를 왕도의 극치에 두려 하였으니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지극하다. 아! 평소의 가진 뜻을 임금 앞에 다 개진(陳) 하고 끝내 처사로서 일생을 마치니 그 마음이 충성(忠誠)하고 그 절의는 높다 하겠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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